리더십

김구선생의 리더십

[코로나 19에서 살아남기] 2006. 1. 1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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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의 리더십

 

3월의 아침에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만세‥(삼일절 노래中에서)"

 

  어두웠던 시절, 절망 속에서 일제(日帝)의 온갖 악행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역만리 타국땅 낯선 곳에 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분들도 많았다.  3월은 이러한 과거를 되새겨 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셨던 분들의 정신을 충·효·예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고 본받아야할 때이다.

 

  충·효·예 정신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서로간에 예절을 지키자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으로 리더의 위치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충·효·예를 바탕으로한 리더십」이라고 한다.

 

 

 

  3월이 오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 그것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몸바쳐 싸우셨던 분들을 생각하고, 또한 국민을 고통 속으로 안내했던 반역도(反逆盜)들을 생각해 보도록 함으로써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역사적 안목을 갖도록 하고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애쓰신 분들 중 김구 선생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충·효·예 정신과 리더십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필자가 김구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지난해 「20세기 한국을 이끈 리더」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1위로 선정될 만큼 온 국민이 동일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만한 분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생님의 삶을 통하여 ‘충·효·예와 리더십’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忠 -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독립투사를 양성

 

  본 사례는 약관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장교를 맨주먹으로 때려죽여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았던 이야기이다. 때는 1896년 2월로 동학농민운동(1894)에 이어 일본군의 단발령과 민 황후 시해사건(1895)으로 말미암아 국민의 분노가 들끓고 있을 때였다.

 

  선생이 “민 황후를 살해한 자가 일본인 일 것이므로 반드시 내손으로 죽여서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치하포(河浦)라는 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던 중에 배가 얼음산(氷山)에 싸여서 표류하게 되었는데, 이때 모든 사람이 죽기 일보 직전이라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그런 때 “우리 서로 힘을 합쳐 얼음덩이와 싸웁시다.”는 선생의 발론(發論)으로 모두가 합심하여 큰 얼음산을 밀어낸 끝에 육지에 닿아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곧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조선 복색(服色)으로 분장한 일본인을 발견하고 끝내 그곳에서 그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선생께서는, 많은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서 혼자의 힘으로 일본인을 죽이려니 모종의 지혜가 필요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인을 수행하는 하수인도 있었으려니와 그의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軍刀)집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선생 혼자서 일곱 사람 분의 식사를 주문함으로써 주인에게 시비를 걸고 이를 통해서 ‘내가 보통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알리기로 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차림새도 남루한 젊은이가 7인분의 식사를 혼자 먹겠다고(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억지를 쓰는 것에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젊은 놈이 미쳤나 보군”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까 얼음산을 밀어내는 힘을 보니 힘이 장사더군, 당연히 일곱 명분은 해치워야지.” 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렇듯 한마디씩 하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선생이 기회를 보고 있던 참에 일본인이 식사를 마치고 마루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때다 싶어 기습적으로 일본인의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차니 그는 한길이나 되는 계단 아래로 떨어졌고 “아이고 나 죽는다”고 고함을 치면서 주위로부터 도움을 청하였다. 선생은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누구든 이 왜놈을 돕는 자가 있으면 모조리 죽일테니 그리 알라!”고 외치면서 일본인의 모가지를 힘껏 밟았다. 그러자 그는 날쎄게 일어서더니 칼을 빼어들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날렵한 일본군 장교였지만 선생의 실력도 보통은 넘었던 지라. 발차기로 일본인을 넘어뜨리고 칼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빼앗은 칼로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난도를 친 후 샘솟듯 흘러나오는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피를 선생의 얼굴에 바르고 피묻은 왜놈의 장검을 들고 “아까 왜놈을 위해 나를 범하려하던 놈이 누구냐?”고 호령하자 행객(行客)들은 모조리 땅바닥에 엎드려 “장군님 몰라 뵈었으니 살려줍시오.” 할뿐이었다.

 

 

 

  죽은 왜인의 소지품을 확인해 본 결과 그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이란 자였고 엽전 600냥이 들어 있었는데 그 돈으로 선가(船價)를 떼어주고 남은 돈은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왜인의 시체는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 아니라 물 속에 있는 어별(魚鼈)에게도 원수인 즉, 이 왜놈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고 분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주막집 주인에게 지필(紙筆)을 대령하라하여 쓰기를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布告文)에 서명하여 큰길가에 붙이게 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군수(郡守)에게 보고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나 집에 당도하여 부모님께 아뢰니 “어디론가 피신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나라를 위해 정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지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써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면 죽어도 영광입니다”라면서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결국 석달 후에 일본인에게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나진포에서 인천 형무소로 이송되던 날(1896년 7월 25일)이었다. 배에까지 함께 타셔서 애타는 모습으로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일본인 순경들이 졸고 있는 틈을 타 아들에게 말씀하시길 “얘야, 네가 이제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모자(母子)가 같이 다니자.” 하시매,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서 위로해 드리자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우리도 모두 죽자고.”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배는 당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인천 형무소생활이 시작되었다.

 

 

 

   형무소에 도착한 선생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다. 이유는 다른 도적들과 함께 취급하는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데 “내가 당초 여타 범죄자들처럼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서 내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달 동안이나 기다렸겠느냐, 너희 관리들은 조선인이면서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한단 말이냐?”고 큰소리를 치고 나자 형무소 관리들의 대우가 달라졌고 옥중에서 왕(王)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형무소 생활에서 선생은 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신 ‘대학(大學)’등 고서를 읽으며,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사고(思考)의 필요성을 깨닫고 감옥에서 많은 동포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등 스승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돌아왔다.

 

 

 

  이때, 다행히도 어명에 앞서 문건을 살피시던 고종황제께서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 : 나라의 어머니 원수를 갚음)임을 보시고 사형을 면하라는 특사령이 내려졌다.

 

  이에 선생께서는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황제께서 특명을 내리신 것은 내가 무의미한 형무소 생활을 하기보다는 세상에 나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거라”라는 모종의 지시로 생각하고 탈옥을 결행(23세, 1898. 3. 9)하게 된다.

 

그 후 선생은 1905년(30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준, 이동영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서고 양산학교(33세)를 세우는 등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나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된데 이어 또다시 안명근(안 의사의 4촌 동생)의 사내(寺內) 총독 암살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의 언도를 받게 되면서, 이름을 ‘두래’에서 ‘구’로 바꾸었다(김구 선생의 이름은 태어날 때 ‘창암’, 16세 때부터 ‘창수’, 25세때 ‘두래’, 38세때 ‘구’로 바뀌었음).

 

 

 

孝 - 아버지에게 배운 斷指(단지)와 할고(割股)의 실천

 

  외동아들로 자란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를테면 선생이 태어날 때 모친의 나이는 열 일곱이었는데 산기가 있고 진통이 시작된지 6·7일이 지나도 순산은 아니되고 산모만 점점 더 위태로워져 갔다. 그러자 동네 어른들이 강제로 선생 부친의 머리에 소의 길마를 씌운 뒤 지붕에 올라가서 ‘음메- 음메-’ 소의 소리를 내게 하고 나서야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날은 할머니의 기일(忌日)이었다고 한다.

 

   선생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 젖을 물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품속에 안고 다니면서 동네 아낙네들에게 젖을 얻어 먹이는 날이 많았다. 그 중 한분(피갯댁이라 하였음)은 한밤중이라도 어린 김구가 배고파 울때면 싫어하는 빛이 없이 젖을 물리곤 했는데 훗날 이 말을 들은 선생께서 그분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곤 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효심은 아버지를 본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 아버지가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을 더 사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 하듯이 선생에게도 그러한 일화가 전해진다.

 

  선생이 일본경찰을 피해 방랑생활을 하고있을 때의 일이다.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이 불길하여 고향집에 가보니 과연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셨다. 큰의원을 모실 형편도 못되어 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단지를 하셨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선생도 단지를 하여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그러나 순간, 단지를 하면 어머니께서 상처를 보시고 마음 아파하실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단지 대신에 넙적다리의 살을 한점 베어서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드리고 살은 불에 구어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숫게 하였지만 시원한 효험이 없었다. 그러자 선생은 이를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때문이라 생각하고 부엌으로 가서 먼저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어내리라 생각하고 살을 썰기는 하였으나 떼어내자니 몹시 아픈지라,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선생은 “단지나 할고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짓이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시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혼자서 상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외아들로서 조문객을 대하자니 상청(喪廳)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雪寒風)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다리 살을 벤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선생의 효심을 발견할 수 있다.

 

 

 

禮 - 예불망열(禮不妄悅)의 신조를 몸소 실천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곧고 강직하여 무엇이든 직성대로 하는 성격이 있었는데 이를 예(禮)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리’를 다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였고, 자식의 도리를 다했으며, 상관의 도리를 다하셨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예컨데 선생께서 어렸을 때 젖을 먹여주셨다는 피갯댁이라는 분의 산소를 지날 때마다 예를 표한 것이라든가, 일본군 장교 ‘토전양량’을 죽이고 포고문을 붙이면서 당당하게 처신하신 일에도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형무소에서 돌보거나 뜻을 같이 해야 할 동포가 있을 때는 그들과 함께 고통을 같이하고자 애쓰셨는데, 가령 옴환자 중에 그러한 자가 있으면 자신의 몸에 옴을 만들어서까지 그들에게 다가가서  힘을 북돋아 주었고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감시자에게 적발되면 모든 책임과 함께 매를 대신 맞으신 경우도 많았다. 또한 광복이 되고 나서 고국 땅을 밟으시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애국지사의 유골을 고국에 모셔와 후하게 장사를 지낸 일이었다.

 

 

 

  실로 선생은 자식으로서, 국민으로서, 지도자로서 도리를 다하신 분이었는데, 면면히 어느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아첨하거나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았고(禮不妄悅), 또 이 같은 삶을 몸소 실천하셨음을 볼 수 있다.

 

 

 

리더십 - 신뢰성(trust)에 바탕을 둔 솔선수범

 

  선생께서는 어떤 상황이 처하든 그때 그때의 상황을 개척하는데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21세때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나룻배에서 표류하던 배에서 발휘된 리더십을 비롯, 일본군 중위 토전양량 살해를 계기로 형무소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민족에게 시련이 닥칠 때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앞장섰다.

 

  선생의 리더십은 오랜 세월동안의 형무소 생활과 독립운동조직을 이끄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이를테면 형무소 내에서 죄수들은 물론이고 관리인들까지  선생을 따르는 이가 많았으며, 1931년(55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독립투사를 양성하던 과정에서 이봉창의 일황저격(1932.1.8), 윤봉길 의사의 백천대장 저격 사건(1932.4.29)에 관한 일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은 1,000여명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이 점차 그 숫자가 줄어들어 겨우 수십여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라 독립운동의 존폐가 달려있을 시기였다.

 

 

 

  하루는 이봉창(李奉昌)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당시 이봉창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던 청년이었는데 이때 주위에 있던 이동녕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일본인일지도 모를 인물을 임시정부 내에 출입시킨다”고 책망을 하는 등 대부분의 주위사람들이 이봉창을 믿지 못하였지만 선생만은 그를 신뢰하였다.

 

 

 

  이는 선생과 이봉창 의사와의 대화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일전에 선생님이 저에게 돈 뭉치를 주실 때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저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돈을 주시나하고 말입니다. 만일 제가 이 돈을 떼어먹기라도 한다면, 임시정부 건물에는 한 걸음도 못나오시는 선생님이 저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과연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또 일황을 저격하러 가면서 “제 나이 서른 한 살입니다.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은 어지간히 맛본 셈입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기념사진을 찍으시지요.”하면서 웃음까지 띠는 것이었다. 비록 일황을 살해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인에게 동화되지 아니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중국의 각종 신문들이 “한인 이봉창 저격 일황 불행부중(韓人 李奉昌 狙擊 日皇不幸不中 :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음)”으로 대서특필되었고, ‘불행부중’이라는 문구를 썼던 모든 신문사가 폐쇄 당하는 등 중·일간 마찰의 원인으로 작용되어 결과적으로는 1. 28 상해사변이 일어나게 한 대 사건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날 윤봉길이라는 청년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는 홍구 시장에서 소채 장수를 하던 젊은이였는데, 중·일 전쟁도 끝났으니 동경 사건(이봉창 의거)과 같은 일에 자신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후 홍구 공원에서 상해사변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천장절 기념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윤봉길은 “제가 할렵니다. 폭탄을 준비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4월 29일 행사일이 다가오자, 그는 임무수행차 떠나면서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 밖에 안되니 제것과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하고 임지로 떠났다.

 

 

 

  그 날 오후가 되자 홍구 공원에서 폭탄이 터져 많은 일본 사람이 죽었는데 곧 폭탄을 던진 사람이 윤봉길이라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일본인들은 배후인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 이 때 김구 선생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만일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동포들이 체포되면 105인 사건과 같이 여러 사람이 고생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통신사에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윤봉길 사건의 주모자는 김구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지고 선생에 대한 현상금이 60만원이 나붙게 되자 장개석 총통이 선생을 만나자고 청을 하는 등 한·중 관계가 호전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돕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김구 선생의 성명서 발표와 지도자다운 리더십이 괄시받아오던  한인의 위상을 격상시킨 것이다. 그 후 선생은 8. 15 광복이 되자마자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고국의 품으로 가져오도록 하셨고, 남과 북이 합쳐 통일 한국을 세우도록 하는 등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시지 못하고 영면하시게 된다.

 

 

 

충·효·예 정신 - 그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

 

  선생께서는 평소 “무릇 한나라가 서서 한 민족의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나라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한편에서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자는 자들이요,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東京)을 우리의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또한 “유생들은 ‘주자’의 방귀까지 향기롭다고 여겼고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였다고 한다. 주자도 좋고 레닌도 좋으나 무엇보다도 항상 자기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역사와 민족성과 환경에 맞는 나라를 세우기로 하자”고 갈파하시면서 “외국과의 교제는 좋지만 외국에 의부(依附)해서는 안되며 ,외국에 배우는 것은 좋지만 절대 세력을 빌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한 척양척왜(斥洋斥倭) 사상만으로 외국을 배척하는 것은 도저히 나라를 건질수 없는 것이니 널리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 연호인 영력 및 년호를 쓰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못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우리는 21세기를 일컬어 ‘문화와 정보시대’ 또는 ‘문화의 전쟁시대’라고 한다. 오늘의 세계는 냉전체계의 이념대립구조를 벗어나 각 나라마다 ‘자기문화’에 바탕을 둔채 '문화산업', ‘정보문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국제경쟁력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선생께서도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내가 원하는 조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모두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바 있다.

 

  이렇듯, 한번 더 거듭나야하는 이 시기에, 우리민족이 간직해 온 정신문화의 뿌리인 충·효·예 정신을 전통문화로 되살려 이를 바탕으로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김종두, 월간 충효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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