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이순신장군의 리더십

[코로나 19에서 살아남기] 2006. 1. 11. 11:52

#코로나 19시대에 #가족건강을 지켜주는 #가이드 [코로나 19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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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리더십 관점에서의 「#이순신 리더십」조명

- 보편적 가치 ‘충·효·예’와의 연계성을 중심으로 -

                                         김 종 두*1)

Ⅰ. 서 론

  #충무공 이순신은 조정이 국가의 안위(安危)마저 당쟁의 제물로 삼아 일본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도 국방에 전혀 무관심할 때 오직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거북선을 창제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 한참 진행 중이 때 투옥과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시련을 극복하고 고군분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인(偉人)이다.

  흔히 李 충무공을 트라팔저(Trafalger)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넬슨(Nelson)과 노․일 전쟁에서 발틱(Baltic) 함대를 전멸시킨 도오고 헤이하찌로(東卿平八郞)와 비교하여 탁월한 전략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정확한 평가로 보기 어렵다. 넬슨과 도오고의 경우는 전 국력을 기울여 전쟁준비를 한 가운데 국민의 성원과 기대 속에서 거둔 승리이지만, 李 충무공은 국왕의 불신과 권신들의 질시 속에서 오직 구국애민(救國愛民) 정신으로 싸워 이긴 의로운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李 충무공의 리더십은 무엇에 바탕을 두었기에 이토록 비범한 리더십이 나올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가족을 사랑하고 부하를 아끼며 철저히 관리할 수 있게 한 충․효․예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李 충무공의 자질을 논(論)하거나 평가할 때 손자(孫子)가 제시한 장재(將材)「智․信․仁․勇․嚴」에 근거를 두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부터 忠․孝․信․勇․仁을 장재(將材)의 기준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忠․孝․信․勇․仁은 원광법사가 화랑도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알려준 계율(세속오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것들은 이미 배달국 시대에는 도의원리(道義原理)로, 고조선 시대에는 오상지도(五常之道)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2) 그리고 중국에서는 智와 信을 장재(將材)로 내세우지만, 우리 민족은 忠과 孝를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역사는 대부분 200~300년을 넘기지 못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역사였던 터라 智와 信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민족은 환국시대 3301년(BC 7199~BC 3898), 배달국 시대 1565년(BC 3898~BC 2333), 고조선 시대 2096년(BC 2333~BC 237)에서 보듯이 수천 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忠과 孝를 앞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을 현대적으로 조명해보기 위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지만, 본 고(稿)에서는 충․효․예 가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다. 이유는 충무공 이순신 만큼 충․효․예, 즉 나라사랑(忠)․가족사랑(孝)․전우사랑(禮)을 실천한 리더를 보기 드물고, 또한 충․효․예는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이자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먼저 리더십과 가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고찰해 보고, 공(公)의 리더십에 나타난 충효예 정신을 도출해 본 다음 현대의 리더십 관점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李 충무공은 이미 지금의 국무총리격의 신분으로 추서된 분이기 때문에 장군이나 제독이라는 호칭보다는 ‘李 충무공’, 또는 ‘이순신 리더십’, 또는 ‘공(公)의 리더십’등의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예를 표하고자 하였다.

Ⅱ. #리더십과 가치에 대한 일반적 고찰

1. #리더십의 일반적 고찰

  리더십의 문제는 인류 집단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관심을 끄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집단을 이끌어야 하고, 또한 그 집단에서 하는 모든 일은 좋은 성과가 나타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음에도 아직 일의적(一意的)으로 정의되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리더십의 현상을 조망하는 관점에 따라서, 또는 시대사조(zeitgeist)에 따라서 리더십의 정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십의 정의는 리더십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stogdill,1974)”, “리더십에 대한 조작적 정의는 연구자의 목적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1977, Campbell)”고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리더십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며, 이미 학자들이 정의한 것만도 350여개에 달하는데 이는 시대적으로 전통적 입장과 현대적 관점으로 나누어 정의해 볼 수 있다. 먼저 전통적 입장(1970년대 이전)에서의 정의는 대체로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을 동기화시키고 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정”으로, 1980년대 이후 현대적 입장(1980년대 이후)에서는 “집단과 각 구성원들의 목표달성을 촉진키 위하여 각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들을 동기화시키는 교호적 및 교환적, 변환적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3)

  #리더와 리더십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은‘리더’라는 용어가 1300년경, 리더십이라는 용어는 1800년대부터인 것으로 옥스퍼드 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다.****4) 시대적으로 지도자의 지도력, 즉 리더십으로 간주할 수 있는 내용이 언급된 것은 중국의 병서(예: 삼략 등)나 법가의 사상서(예: 한비자 등), 서구의 플라톤의 ‘국가론’과 마키아벨기의 ‘군주론’ 등이다. 그리고 리더십에 관한 진일보 된 시각의 접근은 19세기 중반의 carlyle(1841)의 「영웅과 영웅숭배」라는 저서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 저서에서 역사는 소수의 뛰어난 위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그러한 위인들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훌륭한 자질이나 특성을 타고난다고 보았다.

  #리더십 이론의 과학적 발전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심리학 분야의 발전과 미국의 산업혁명 때문이었다. 1860년도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수공업에서 공장산업조직으로 발전시켰고, 이에 따라 불어난 인원과 생산물에 대하여 관리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에 등장한 위인이론은 특성론(1920~1950)이라는 이론적 접근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특성론은 리더가 보유하고 있는 정신능력이나 심리적 특성이 보통사람들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구분하는 것으로, 이 이론은 리더십 연구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인 이론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리더의 특성에 대하여 타당성 있는 측정이 어려운 내적특성을 규명하기보다는 객관적 관찰과 특정이 용이한 외적행동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우세해지면서 리더의 행동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됨으로써 1950년대 이후 약 20년 동안을 리더의 행동에 대한 연구가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리더특성이나 리더행동에 관한 연구접근법에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리더와 부하간에 적용되는 각종 상황에 의해 부하의 특성이나 행동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상황이론으로 발전하기에 이르게 되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직의 환경적 요인 등 상황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상황론이 대두하게 된다. 이후 1975년도 월남전이 종료되고 나서, 미군의 패망원인이 미군 리더들의 비윤리성에 있었다고 분석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80년대에 와서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고 부하에게 권위를 과감히 위양함으로써 동기유발을 촉진시킨다는 변환이론이 대두되게 되는데, 이와 함께 카리스마 리더십, 가치중심리더십, 원칙 중심 리더십, 셀프리더십, 슈퍼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리더십은 심리학, 경영학, 종교학, 교육학, 군대 등 각 분야의 리더십이 발전되어 오고 있으며 신뢰성, 동기유발, 사랑, 책임 등의 본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리더십의 구성요소인 리더․구성원․상황요인의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리더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 #가치의 일반적 고찰

   가치는 인간정신의 목표가 되는 보편타당의 당위(當爲)로 조직 구성원에게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주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가치는 공동체의 주요 부분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을 파괴하지 않고, 일상적인 정책의 지침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에 관해서 폭 넓은 한계로써의 기능을 한다.”(데이비드 이스튼)*****5),  “조직이 가치를 공유하게 되면 구성원에게 일체감을 부여하고 지속적으로 목표의식을 부여하며 지속적인 목적의식을 갖게 한다. 또한 성공의 방법을 하나로 통합시켜주고 현재와 미래의 참된 의미를 제시해주며 리더와 추종자 모두에게 힘을 제공한다.(고든 설리번)”*6)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李 충무공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국왕을 비롯한 대다수의 조정대신들로부터는 오해와 모함을 받아야 했고 사형선고와 백의종군을 반복해야 했으며,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나 국민들은 무엇 때문에 그를 흠모하면서 신뢰하였는가에 대한 문제는 李 충무공 그리고 조정 대신과 국민들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본디 인간은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방향을 선택하는 속성이 있다. 때문에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어떤 가치를 지향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데, 대체로 ①물건의 값어치, ②사물의 중요도, ③인간정신의 목표가치는 보편타당의 당위라는 철학적 의미이다. 예컨대 “저 물건은 5만 원짜리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성찰되지 않은 인생은 삶의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 “가치는 조직원에게 일체감을 부여하고 성공의 방법을 하나로 통합시켜 준다.(고든 설리반)”는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공(公)이 어떤 가치에 기반을 두고 리더십을 발휘하였기에 그토록 빼어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필자는 그것을, 공(公)께서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인 忠, 어머니와 가족들을 공경과 사랑으로 대하는 孝, 부하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장수로서 도리를 다한 禮 등의 보편적 가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Ⅲ. 「#이순신 리더십」에 나타난 #충·효·예

1. 이순신의 삶에 나타난 리더십 개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서울에서 부천 덕수(德水) 이씨(李氏) 이정(李貞)과 모친 초계(草契) 변씨(변(卞)氏) 사이에서 4남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벼슬을 하지 않아 집안이 가난하여 서울 생활을 못하고 모친의 친가가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지금의 뱀밭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는 뒤늦게 32세(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함경도 변방 삼수(三水) 고을의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종9품)의 직책을 시작으로 죽기까지 20여 년을 주로 무관생활을 하였으며 억울한 누명으로 두 번 (1587년, 1597년)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는 쓰라림을 겪었다.

  공(公)의 54년간 삶을 되돌아보면 32년간은 무과시험에 급제하기 위한 수련의 기간이었고 나머지 22년이 공인으로서 생활한 기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7년을 제외하면 하위직 벼슬살이를 전전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나서 불과 2개월 만에 국토의 대부분이 왜군 수중에 들어갔을 무렵에도 전라 좌수군절도사가 된 李 충무공은 거북선으로 쳐들어오는 바다의 적을 수장시키는 등 영해를 굳게 지켰으며, 삼도 수군통제사의 중책을 맡아 남해에서 끊임없이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전략 전술을 개발하는 등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공직자로서 구국의 일념으로 수범을 보인 부분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공(公)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 47세에 좌의정 겸 이조판서였던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전승을 거두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위국헌신의 충성을 다하여 적을 무찔렀으며 마지막 노량 전투에 임하기 전 “이 원수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축원을 올린 다음 전투에 참여하여 전투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죽음에 이른 순간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충절의 마음을 간직하였다.

  훗날 선조는 제문에서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안 버렸다.” 하며 애달픈 심정을 토로했고, 정조는 손수 지은 ‘충무공신도비문’에서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의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나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 발탁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사령관 도고헤이하치로는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라고 하였다.

2. #충·효·예의 가치(價値)적 고찰

  가. 충· 효· 예의 본질

  본질(本質)은 근본과 바탕을 뜻하므로, 충효예의 본질은 忠·孝·禮가 갖는 근본과 바탕을 의미하는데, 이는 글자에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1) #忠의 본질

  忠은 가운데 중(中)자와 마음 심(心)자의 합자이므로 ‘마음의 중심’을 의미하는 글자인데,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가운데 중(中)자를 입 구(口)자와 뚫을 곤(丨)자의 합자로 보는 견해이다. 즉, 입(口)은 음식을 먹고 말을 하는 기관이니 자기 몸과 마음도 바르게(中)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예컨대 중국의 주자가 충을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이라고 한 말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충이란 “농사꾼은 농사일에, 나무꾼은 나무하는 일에, 장사꾼은 장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곧 충이요 애국이다.”라고 한 말과 맥을 같이한다. 둘째, 가운데 중(中)자를 나라 국(囗)자와 뚫을 곤(丨)자의 합자로 보는 견해이다. 즉, 나라(囗)가 있어야 가정과 사회가 있는 것이니 나라를 위해 도리를 다하는 국가윤리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컨대 ‘충을 다함으로써 나라를 보위한다.(盡忠報國)’,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 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충의 본질은 ‘직분충실’, ‘나라사랑’으로 집약할 수 있다.

    2) #孝의 본질

  孝의 본질을 살펴보면, 孝자를 생각할 고(考)자와 아들 자(子)의 합자로 보느냐, 늙을 노(老)자와 아들 자(子)의 합자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 생각할 고(考)자와 아들 자(子)의 합자로 보는 견해로써 부모와 자식은 서로 생각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제사일에 지방에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라고 쓰는데, 예기에서 ‘考’자는 조상을 생각한다는 뜻인 것이다. 중국의 증자가 효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것(大孝尊親)이라고 한데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정신적인 효를 의미한다. 둘째, 늙을 노(老)자와 아들 자(子)의 합자로 보는 견해로 자식은 늙으신 부모를 봉양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 물질적인 효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장21절)” 라고 나와 있듯이 물질적으로도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孝의 본질을 집약하면 부모님을 편안하게 근심걱정 끼치지 않는 ‘정신적인 효’와 물질적인 효로서 생활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봉양하는 ‘물질적인 효’의 의미가 합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3) #禮의 본질

  禮의 본질은 ‘示’자를 ‘바칠 시’로 보느냐 ‘보일 시’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미로 해석 되는데, 첫째, ‘示’자를 바칠 시자로 해석하면 “제물(曲)을 제기(豆)에 올려놓고 하늘에 바친다.”는 의미이다. 즉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예컨대 ‘예는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禮也者理也)’, ‘예란 상관을 망령되어 일컬어 기쁘게 하지 않는 것(禮不妄悅)’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둘째, ‘示’자를 보일 시자로 해석하면 ‘나의 몸을 풍성히(豊) 잘 꾸민 것처럼 상대방에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적 관점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데, 예컨대 “예로서 나를 꾸미고 의로서 내 마음을 통제한다.(禮以飾身 義以制事)”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식당예절, 복장예절, 전화예절, 교통예절 등이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예의 본질을 집약하면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의미로 ‘조화와 질서’, 사랑의 실천과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의미로 ‘존중과 배려’의 의미인 것이다.

  나. #忠·孝·禮의 유래

  충효예 정신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체로 공자․맹자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공맹시대는 BC 500년경이지만 환국․배달국․고조선 시대는 그 훨씬 전이기 때문인데, 환국시대(BC 7199부터)나 배달국 시대(BC 3899)는 그렇다 치고 개천절로 삼고 있는 고조선 건국(BC 2333)일부터 만이라도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여기서 기술하는 내용은 비록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 고서(古書)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교과서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21세기는 문화의 전쟁시대가 될 것이다.(샤무엘 헌팅톤)” 라는 예언과 같이, 동북공정 사태 등 이미 문화의 전쟁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고조선 시대의 역사 복원이 시급하다고 본다.**7)

  충효예 사상의 기록을 찾아보면 환국시대(BC 7199~BC 3899)에는 ‘오훈(五訓:다섯 가지의 가르침)’이 있었는데 「① 성신(誠信)하여 거짓이 없어라. ② 경근(敬勤)하여 게으르지 말라. ③ 효순(孝順)하여 어기지 말라. ④ 의로우며 음란하지 말라. ⑤ 겸손하고 온화하여 다투지 말라」는 내용이다.***8)

  배달국 시대(BC 3899~BC 2333)에는 ‘삼륜’과 ‘도의원리’가 있었는데, ‘삼륜(三倫)’은 사람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윤리로서 애(愛), 예(禮), 도(道)이다. 「① 愛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부모는 자비(慈)로워야 하고 자식은 효도(孝)해야 한다”. ② 禮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임금은 의로(義)워야 하고 신하는 충성(忠)해야 한다”. ③ 道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스승은 바라야(正)하고 제자는 스승을 공경(敬)해야 한다」****9)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도의원리’는 「① 충성으로 나라 섬기기(事君以忠), ② 효성으로 어버이 섬기기(事親以孝). ③ 신의로 벗 사귀기(交友以信), ④ 전쟁에서 물러남이 없기(臨戰無退). ⑤ 산 것은 가려서 죽이기(殺生有擇)」로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와 같은 것이다.*****10)

  고조선 시대(BC 2333~BC 237)에는 ‘중일사상(中一思想)’과 ‘오상지도(五常之道)’가 있었는데 ‘중일사상’은 3대 단군 가륵(BC 2150)임금 때 제정된 것으로 「임금이 마땅히 의로워야 신하가 마땅히 충을 행하고(爲君當義 爲臣當忠), 부모가 마땅히 자식을 사랑해야 자식 또한 마땅히 효를 행하며(爲父當慈 爲慈當孝), 부부 간에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한다(爲夫婦當相敬)」*11)는 내용이고, ‘오상지도(五常之道)’는 忠·孝·信·勇·仁으로 배달국 시대의 도의원리, 그리고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와 똑같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부터 우리의 고유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교에서의 ‘삼강오륜’과는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남존여비 등 수직적이고 무조건적 사상이 내포된 반면 우리의 사상은 수평적이면서 쌍무 호혜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공자(公子)가 태어난 시점(BC 551)보다도 훨씬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신라 화랑제도를 만든 진흥왕(신라 제24대)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먼저 배달국의 역사를 가르쳐라.(欲興邦國 須先風月道)” 라고 했는데, 나라를 지키는 힘은 역사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갈파한 말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현재, 이러한 상고시대에 관한 내용을 접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만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 여기도록 교육되어 왔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3. 충무공 이순신의 삶에 나타난 충··

  #난중일기에 나타난 李 충무공의 생애는 충효예를 실천한 삶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두 번씩이나 억울하게 #백의종군을 당하면서도 오직 나라 구할 생각을 했고, 가족들에게도 애틋했으며 부하 사랑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李 충무공의 삶을 통하여 충효예 정신을 도출해 보기로 한다.

  가. 李 충무공과 국가윤리(忠)

  忠의 의미는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마음(盡心), 곧고 바른 마음(中正), 나라와 내가 하나 되는 마음(一心), 정성을 다하는 마음(誠心)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충의 관점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위국헌신의 충성

  공(公)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한 군인이었다. 그는 오직 나라의 안위만을 생각하였으며 때로는 한탄과 울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때가 많았다.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티끌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 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홀로 뱃전에 않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난중일기 1593년 7월 9일).” 공(公)께서는 이날 왜적에 의해 광양, 순천 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뼈 속들이 저렸다고 한다. 또한 조정에서 행하는 인사나 상벌의 불공정성에 대해 심히 걱정하였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과가 표창하는 징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난중일기 1592년 2월 25일)

  공(公)은 자신이 사도를 점검하였는데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았었는데도 순찰사는 표창을 올린 것이다. 또한 공(公)은 꿈속에서도 순변사 이 일의 무책임한 언행을 꾸짖으며 유성룡과 함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기도 하였으며 간밤의 꿈을 왜군이 멸망할 징조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성룡이 돌아갔다는 부고가 순변사에게 왔다고 하나 이는 필히 질투하는 자들이 만들어 하는 것이리라. 걱정이 쌓여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만일 유 정승이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 할 것이랴. 어찌 할 것이랴.”라고 하였다.

공(公)은 마지막 노량 전투에 임하기 전에 “이 원수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축원을 올린 다음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전투 중, 적의 유탄에 맞았을 때에도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충절을 보여주었다. 

 

  2) 투철한 #책임감과 연구하는 직무자세

  李 충무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투철한 책임감을 지닌 군인이었다. 공(公)이 군인의 길에 들어설 때는 육군이었다. 그는 함경도 변방 삼수고을의 동구비보의 권관이었다. 이곳에서 3년간 재임하였는데 사무처리에 엄격하기로 이름난 함경도 감사 이준백은 동구비보가 규율이 가장 엄정하여 나무랄 데가 없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45세에 정음현감을 할 때에는 인간의 도리로서 다스리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백성들이 부모처럼 따랐다고 한다.

  또한 수시로 전쟁방비태세를 점검하여 그 책임을 소홀히 한 자는 엄히 문책하여 엄격한 규율과 벌로써 군기를 확립해 나갔다. 한편으로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군사들에게는 상을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또한 李 충무공은 거북선과 함선 대포 총통 화약 등 무기 및 장비개발과 제조를 통해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스스로 부단히 궁술과 같은 무술을 연마하고 병법서를 읽으면서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였으며 지리를 연구하였다. 공(公)의 일기에 활쏘기를 했다고 기록한 곳이 270여 회나 나온다.

  “조선소에서 나를 때때로 목수들의 일을 눈여겨 들여다보았다. 목수들은 둥근 고임목을 괴고 그 위에 선체를 만들어 나갔다. 고임목은 선체를 진수시킬 때 바퀴구실을 했다. 배 밑창에 목재를 댈 때 이음새에 송진을 발랐다. 목재를 포개서 붙일 때는 나무못을 박았다. 못을 수직으로 박지 않고 비스듬히 박아 위아래를 관통시켰고 남은 못대가리를 대패로 밀어냈다. 이물과 고물을 얹을 때는 나무못을 쓰지 않고 목재의 접합부를 파내서 사개를 물렸다. 갑판은 대청마루를...”등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12)

  나. 李 충무공과 가정윤리(孝)

  孝는 가정윤리로써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정성,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도리 등으로 해석된다. 또한 효는 인륜질서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백행지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효의 관점에서 李 충무공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李 충무공의 가문을 위하는 마음

  李 충무공의 가정생활을 일기를 통해 살펴보면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에 대하여 성실하고 극진한 관심과 지도를 아끼지 않았으며, 진솔하고 솔직한 애정을 표시하는 등 가족뿐만 아니라 조카에게 까지도 배려와 사랑이 컷 음을 볼 수 있다.

  李 충무공의 가계 및 계보를 살펴보면 덕수 이씨로서 공의 11대조부터 8대조까지 고려조에 4,5품의 문관직을 역임하였고, 6대조부터 조선조에 문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조부 때부터 벼슬한 이가 없었다. 공(公)은 4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일찍 죽게 되자, 장남의 네 조카, 차남의 두 조카를 친자식처럼 양육시켜 4명을 문, 무과에 급제케 하는 등 자식과 똑 같이 대했음을 알 수 있다.

  부인에 대한 애정표시도 난중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부인이 병이 중하자 아들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게하고 답답한 나머지 손수 점을 쳐보기도 한다. 또한 부인의 생일축하를 위해 자식을 배에 태워 보내면서 자식을 실은 배가 떠나가는 모습을 멀리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공의 인간성을 역력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李 충무공의 #부모사랑

“나라에 충성을 바치느라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 만은 어버이마저 가버리셨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13) 이 말은 공(公)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1597.4.19)의 그 슬픔을 난중일기에 남겨놓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 공(公)의 나이는 48세였고 모친은 76세이셨다. 난중일기에 보면  어머니를 뵙기 위해 상관에게 휴가를 청하는 글이 있는데 “자식이 아침에 나가 돌아오지 않아도 어버이는 문밖에서 기다린다고 하거늘 하물며 찾아뵙지 못한지 3년이 지났으니 얼마나 안타까이 기다리시겠습니까?, 요즘 인편에 들으니 노환이 날로 심하여 여생이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자식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십니다, 이 자식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내용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히 베어있음을 볼 수 있다.

  공(公)께서는 전란 중에도 어머니를 늘 그리워하였으며, 어머니가 궁금해하시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일기장에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 노모께서는 ‘잘 가거라. 가서 나라의 욕됨을 크게 씻어라.’ 하시며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시며 위로하셨다.('94.1.12)”, “하루종일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니를 찾아뵈오니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 앉으시는데 기력이 흐려져 몇  을 더 보전하시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그 마음을 즐겁게 풀어드리기 위하여 장년의 시름을 잊고 소년의 모습으로 어머니를 위로하였다.('96.8.12)”, “새벽꿈이 몹시도 뒤숭숭하였다.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해 마음이 괴롭고 눈물이 흐른다.('97.4.11)” 꿈을 꾸고 나서 종 순화(順花)를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자세히 알아오도록 하였는데, 순화가 급히 달려와 “대부인께서는 고향 아산으로 돌아오시는 도중 별세(4.13)하셨다 합니다.”고 전하는 것이었다. 공(公)께서는 “불효자의 옥사 때문에 병환이 나시더니 기어이 돌아 가셨구나.” 하고 원통해하면서 ‘게바위’ 나루터에 가보니 영구를 실은 배가 도착해 있었다. 공(公)은 “자식된 도리로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죄를 받아 옥중에 있었으니 불효를 더한 것이 아니옵니까?” 하면서 통곡할 뿐이었다.****14)

  공(公)의 두 형님은 이미 작고하신 상태라 맞 상주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옥에 갇혔던 처지이다 보니 15일에야 입관하고 다음날에야 아산에 빈소를 차렸다. 하지만 4월 19일 금부도사가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장례도 미처 치르지 못하고 어머니 영 앞에서 울부짖으며 하직하였다.

  공(公)은 모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진중에서 어머니를 아산에 남겨 두고 와 근심하다가 문안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어머니를 가까운 순천에 모셔 부인과 자식들로 하여금 봉양케 했다. 그러나 사무에 얽매어 어머님 생신날 못가 뵈어 한탄하는가 하면 휴가 시에 어머니를 찾아뵙고 허약해진 모습을 보고 눈물겨워 하며 백의종군 때 부음을 듣고 애통해 하는 공(公)의 모습은 가슴을 찌르는 데가 있다. 백의종군 틈틈이 손수 장례준비 제물을 만들어 고향으로 보내는 모습은 공(公)의 효심을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李 충무공의 #자식사랑

  공(公)께서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뿐 아니라 자식사랑도 남 다르셨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내아들 ‘면(葂)’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들으신 날(10.14)의 일기에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다더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딜 갔느냐. 내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목숨은 연명이야 하고 있다 만은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라는 애절한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자녀들에 대한 애정의 극진함도 일기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아들 면이 종기로 괴로워할 때 멀리서 애를 태우고 의원을 고음천까지 보내 치료케 하고 자식들이 활을 쏘거나 말 타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들의 문, 무과 시험 성적을 알아보고 합격을 축하해 기뻐하기도 한다.  본부인에게 3남 1녀, 2명의 소실로부터 2남 2녀가 있었으며 무과 급제한 아들 중 양난 때 3명의 아들이 전사하였다.(형님 조카 포함 총 11남 3녀 중 4남이 양난전투에 참여 전사)

  다. 李 충무공의 #사회윤리(禮)

  禮는 사회윤리로써 상대방의 입장에서,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매사를 옳고 바르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예는 이치에 맞아야 하고, 망령되이 상관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예불망열)이다. 또한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인간으로서의 도리(예야자이야)를 추구한다. 이러한 효의 관점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강직한 #성품

  李 충무공은 권세가에 아부하거나 굴하지 않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고 옳다고 여긴 일은 반드시 실천하였다. 함경도 변방 삼수 고을의 동구비고의 권관을 마치고 서울 훈련원 봉사로 영전하였다. 여기서 李 충무공은 자신의 직속상관 서익이 자기와 친분이 있는 직원을 서열을 무시하고 정 7품인 참군벼슬로 승진시키려하자 능력위주의 진급이 아닌 정실 인사의 부당함을 들어 반대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병조판서 김귀영은 그의 서녀를 이순신의 첩으로 주고자 하였으나 李 충무공은 “이제 내가 벼슬길에 갓나온 사람으로 권세 있는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김귀영은 이순신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아꼈다고 한다.

  또한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보낸 편지에,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발포영 객사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을 때에도 李 충무공은 “그 오동나무가 비록 한 그루의 나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 공유물임에 틀림없고, 어떤 특정인의 일시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쓰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거절한 일 등의 일화는 유명하다.

    2)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지닌 지휘자

  李 충무공은 결코 어떠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항상 그 스스로 전투 중 필승의 신념과 불굴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도 이러한 신념과 의지를 독려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는 원균이 거제도 옥천량 해전에서 최초로 일본의 시행된 일본의 수륙합동작전에서 참패하고 李 충무공이 여러 해를 두고 가꾼 무적함대가 하룻밤에 거의 전멸을 당하자 조정은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李 충무공은 말하기를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막아낼 도리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9월 14일 명량에서 333척(역사 스페샬에서 나온 적 전선의 개수)의 왜군 함대와 결전하기를 앞서 공(公)께서는 장병들을 모아 엄숙히 약속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을을 결의하고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의 삶을 꾀하면 죽음을 당한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에 따라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즉 공(公)께서는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선두에서 부하들과 함께 싸운 것이다.

    3) 위엄과 인자함을 겸한 #지휘자

  공(公)은 부하들에게 위엄과 자애를 함께 보인 지휘자였다. 정유년 10월 그믐날 새벽에 공(公)께서는 우수영에게 진지를 어란진으로 옮길 때 우수영에 살던 백성들이 수군을 따라나서자 발진시간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손수 백성들을 전선에 옮겨 실어 어란진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옥에 갇혀 있던 하급관리들을 적이 해남을 유린할 때 백성의 처녀 7명을 붙잡아 적에게 인도하고 명량해전 때 후미에서 배를 불지르고 달아났다는 죄로 심문과 자 후에 과감하게 목을 베었다. 이처럼 공(公)은 상벌을 엄정하게 시행하여 군율을 엄정히 세웠고 자기의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방기하는 자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하였으나 반면 따뜻한 인정을 지니고 있었다. 공(公)은 영남의 수군들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측은지심을 발휘했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주도록 사람을 보내기도 하였다. 격군들에게 술을 먹였으며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난중일기 1594년 1월 19일, 1월 20일, 1월 21일 등) 장군은 수백 명의 왜군 포로를 잡아 일을 시키면서도 때때로 술을 베풀기도 하였다. 전쟁 당시 피난민과 패잔병까지도 그와 함께 싸우려고 모여들었고 일치단결하여 싸울 만큼 신뢰를 받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평소 공(公)의 인자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Ⅳ. 현대 리더십 관점에서의 「이#순신 리더십」의 조명

1. 현대의 지식정보화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십

  현재와 같이 정보화되고 민주화된 현대적 상황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정성과 투명성 등 고도의 도덕성과 윤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고위공직자나 군 리더들이 그들의 비행사실이 언론에 노출되어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과거에는 알려지는 범위나 속도가 지금처럼 넓거나 빠르지 않았지만 현대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확산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더에 대하여 구성원들의 다양한 평가 기준과 시각이 존재하며, 비판기능 강화 등으로 과거와 비교시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성과 솔선수범적 리더십을 요구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현대적 리더십은 과거 전통적 리더십과 많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상호의존적이며 교호적․변환적 리더십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의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이지만, 현대의 각종리더십, 예컨대 변환적 리더십, 카리스마리더십, 원칙중심리더십, 가치중심 리더십의 관점에서 조명해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리더십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을 현대적 리더십과 비교하여 조명해 보기로 한다.

2. #가치중심 리더십과 「이순신 리더십」

  가. 가치 중심의 리더십의 개관

  가치중심(Value Based)의 리더십은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가치관 혼돈(아노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리더십이다. 이는 1990년대 말 수잔 쿠즈마스키(Susan S. Kuczmarski)에 의해 제기된 이론으로, 개인적 규범과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가치 충만한 조직 환경을 만들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만족을 얻게 함으로써 조직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리더십이다.*****15)

  사람은 누구나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방향을 선택하는 속성이 있다. 때문에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가게 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데, 예컨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유관순 등은 어떤 가치기준의 삶을 살았기에 그토록 목숨까지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으며,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나 안두희와 같은 암살범은 어떤 가치기준을 가졌기에 그러한 짓을 했는가 하는 것은 역시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가치를 중심으로 한 리더십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이 종료된 이후부터이다. 이를테면 미군이 소총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하는 월맹군에게 패하고 나서, 그 원인을 분석해 본 결과, 전투에 참여한 미군 장교·부사관 등의 비윤리성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부하가 쏜 총에 사망한 이원이 무려 1,016명이나 되는데, 이는 간부 전체 사망자의 20%에 해당하는 인원이라고 가브리엘 교수가 밝힌바 있다.*16) 미군 지휘부에서는 윤리와 도덕성의 타락성이 심각하다는 판단아래,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7대 핵심가치(충성·의무·성실․존중․명예․정직․용기)를 선정했던 것인데, 미군들은 이때부터 7대 핵심가치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 항상 생각하게 하는 등 중점적으로 추진한 결과 걸프전에서는 그와 같은 비윤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군도 이를 참고로 육군 5대가치를 선정, 2002년 새해 시무식과 함께 선포식을 거행한 바 있다.

    나. 가치중심 리더십에서 본 「이순신 리더십」

  가치중심 리더십의 관점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을 살펴보면 첫째, 가정윤리 인‘孝’가치에 바탕을 둔 리더십이다. 공(公)께서는 부모사랑과 가족사랑을 몸소 실천했을 뿐 아니라 부하들의 가정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李 충무공이 부하들로부터,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그와 같은 흠모를 받게 된 데에는 李 충무공이 효의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사회윤리 ‘禮’의 가치에 바탕을 둔 리더십이다. 예의 가치는 하늘의 순리에 따르고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충무공은 상관에게는 옳은 것은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하면서 분명하게 처신한 반면 부하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관대하였으며 배려적 사랑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셋째, 국가윤리인 ‘忠’의 가치에 바탕을 둔 리더십이다. 李 충무공의 백의종군을 두 번이나 당하고 어머니의 장례까지도 치르지 못하면서 적을 무찌르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정신(忠)에 바탕을 둔 리더십인 것이다.

 

3.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이순신 리더십」

  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개관

  카리스마란 원래 그리스 어로 예언이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천부적 자질’이라는 뜻이다. 사회학자 Max Weber(1947)가 직책이나 전통 등의 권위에 의거하지 않고, 부하들이 특별한 자질을 갖춘 리더라고 자발적으로 추앙함으로써 갖게 되는 영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카리스마적 리더에 관한 주제는 정치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정치지도자, 사회운동가, 종교지도자 등과 관련해서 논의되어 오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서 심리학 및 조직행동학의 리더십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House(1977)는 최근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의 선구자로 그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보통사람들과는 어떻게 다르며, 어떤 상황에서 카리스마적 리더가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가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House에 의하면, 카리스마적 리더의 예하에 있는 부하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인다. ① 부하들은 리더가 갖고 있는 신념이 옳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② 부하들도 리더와 같은 신념을 갖고 있다. ③ 부하들은 리더의 요구에 의문을 제기함이 없이 따른다. ④ 부하들은 리더를 진정으로 좋아한다. ⑤ 부하들은 리더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⑥ 부하들은 집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다. ⑦ 부하들은 일을 잘 해야겠다는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다. ⑧ 부하들은 각 개인이 모두 집단의 임무 완수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등이다.**17)

 

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서 본 「이순신 리더십」

  李 충무공은 32세 때 무과에 급제해서 54세까지 22년의 공직생활을 했다. 그리고 22년이라는 기간도 임진왜란 7년을 제외하면 하위직 벼슬살이를 전전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명랑해전에서 적선 330여척을 불과 12척으로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은 가히 장수로서 천부적 재질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토대로 공(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첫째, 李 충무공 휘하에 있는 장졸들이 이순신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하도록 한 점이다. 둘째, 부하들에게까지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하였으며 셋째, 부하들이 공(公)의 리더십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고 진정으로 흠모하고 복종하게 한 점이다. 넷째, 부하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참여케 하고 다섯째, 전투승리라는 임무완수에 부하들이 기꺼이 응할 수 있게 한 점을 들 수 있다.

4. #변환적 리더십과 「이순신 리더십」

  가. 변환적 리더십의 개관

  변환적 리더십은 조직체의 직책위계 상에서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발휘될 수 있다. 상급자의 변환적 리더십에 의해 부하가 변환될 수도 있고, 부하의 변환적 행동에 의해 상급자가 변환될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보통의,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Burns(1978)는 변환적(Transformational) 리더십을 “리더와 부하가 상호간 더 높은 도덕적 및 동기적 수준을 갖도록 만드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변환적 리더는 공포, 탐욕, 질투, 미움 등과 같은 하등 수준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인본주의 등과 같은 고등 수준의 이상과 도덕적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부하의 의식을 고양하여 집단의 목표 달성을 추진한다.

  Burns는 변환적 리더십과 거래적(Transactional) 리더십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변환적 리더십이든 거래적 리더십이든 리더의 영향으로 인하여 동기화 된 부하는 결과적으로 이득을 얻게 된다. 거래적 리더십은 개인의 이기적 관심을 자극하여 부하를 동기화시키는 방법이다. 거래적 리더십에서 강조하는 가치는 정직성, 공정성, 책임성, 상호성 등이다. 이에 비해서 변환적 리더십은 고차원적인 가치관과 도덕성을 자극하여 동기화시킨다. 부하의 반응에 따라서 행동을 변경해 가면서 고차원적 동기가 유발되도록 꾸준히 노력한다. 변환적 리더는 이러한 변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개인적 수준에서의 영향력 과정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조직체의 구조적 수준에서도 체제의 변화와 기구의 개혁을 시도한다.

  Bass(1985)는 Burns의 이론과 카리스마적 이론을 종합하여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변환적이라는 것을 리더의 부하에 대한 효과성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변환적 리더십 아래에서 부하는 리더를 신뢰하고, 숭배하고, 충성으로 모시고, 존경하며,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도록 동기화된다. 리더가 부하를 이렇게 변환시키는 방법은 ① 부하들로 하여금 그들이 과업 완수에 중요하고 가치로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고, ② 그들로 하여금 이기적인 관심을 초월하여 집단이익을 위해 관심을 갖게 만들며, ③ 그들의 고차적 욕구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Bass는 변환적 리더십을 카리스마와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도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추종자들에게 체계적인 변환을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은 갖고 있지 않다. 카리스마는 변환적 리더십의 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변환적 리더는 부하들에게서 강렬한 감정을 이끌어 내고, 리더를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인도자로서 또는 스승으로서 부하들을 체계적으로 변환시키는 사람이다.

  Bass의 이론이 Burns의 이론과 차이 나는 점은, Burns는 부하의 도덕적 가치나 고차적 욕구를 계발함으로써 종국적으로 부하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경우만을 변환적이라고 본 반면, Bass는 부하의 동기를 유발시켜서 헌신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이면 모두 변환적인 것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나. 변환적 리더십에서 본 「이순신 리더십」

  李 충무공의 리더십을 변환적 리더십에 비추어본다면 첫째, 공(公)이 보여준 높은 도덕성과 부하들로 하여금 도덕성이 동기화되도록 한 점이다. 예컨대 서익의 인사청탁을 거절한 일이나 병조판서 김귀영의 서녀를 첩으로 삼도록 권유 받았을 때 거절한 점 등을 통해서 높은 도덕성을 엿볼 수 있으며, 그러한 공(公)의 영향을 받아서 부하들까지도 높은 도덕성을 견지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부하들로 하여금 李 충무공을 신뢰하고 숭배하며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점이다. 공(公)께서는 결코 어떠한 불리한 상황 하에서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컨대 명량해전을 앞두고 불과 배 12척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삼도 수군통제사로 복직하여 임무를 수행 하면서 공(公)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은 승리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5. #윤리적 리더십과 「이순신 리더십」

  가. 윤리적 리더십의 개관

  인간은 과거 동굴 거주시대부터 리더가 가져야 할 윤리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그렇지만 리더들의 윤리적 행동에 대한 풍부한 전기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리더십 윤리의 이론적 기초에 대한 연구결과는 거의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1996년도 미국의 캘로그 재단(kellogg Foundation)의 후원에 의해 결성된 일단의 리더십학과생들에 의해

윤리가 리더십의 핵심이라는 연구를 내놓은 것이다.***18)

  리더십에서의 윤리이론은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는데 지침이 되는 법칙과 원칙의 체계를 제고해준다, 또한 도덕적으로 고결한 인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윤리이론은 어떻게 하면 윤리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사결정 지침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윤리가 리더십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윤리적 리더십은 존중․봉사․정의․정직․공동체 윤리 등 다섯 가지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윤리는 리더십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리더는 조직의 가치를 확립하고 강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모든 리더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신념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리더는 그들 나름대로의 비망록을 가지고 있으며 일련의 신념, 제안, 가치, 아이디어 그리고 다루고 싶은 이슈들을 가지고 있다. 한 리더에 의해 촉진되는 가치들은 그 조직 전체의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하면 리더의 영향력은 조직 내의 윤리적 환경을 확립하고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 윤리적 리더십에서 본 「이순신 리더십」

  이 충무공의 리더십에 윤리적 리더십을 대입해본다면 첫째, 李 충무공의 리더십은 그 자체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에 대한 판단의 척도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른 것은 그르다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에 잘 나타나있다.

  둘째, 윤리적 의사결정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발포영객사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고자한다며 오동나무를 베어오라 할 때 공유물임을 내세워 베지 못하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셋째 李 충무공이 리더로서 재직하는 동안 상관과 부하가 서로 존중하고 국민께 봉사하였으며 정의와 정직을 장병 모두가 실천케 하는 등 공동체 윤리를 잘 구현한 점이다.

 

Ⅴ. 결 론

   얼마전 “리더는 있으나 리더십이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세간의 관심이 된 바 있다. 가정이나 학교, 군대, 종교단체 등 어느 곳이나 리더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자리에 합당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살 수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리더십에서도 한국인이라는 ‘리더’가 한국인이라는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국문화라는 ‘상황’요인을 적용하기 위해서 이에 맞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 모델은 「이순신 리더십」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세계화․국제화를 지향하고 지식정보화시대의 글로벌 리더십이 요구되는 마당에 한국적인 면만 강조하는 것도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리더의 정신은 李 충무공과 같은 자세를 견지하고, 리더십의 기술은 서양에서 발전시킨 것들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면 될 것인데, 이 또한 「이순신 리더십」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옛 것을 오늘에 맞게 적용하는 古爲今用(고위금용)의 지혜가 필요하며「이순신 리더십」을 오늘에 맞게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치중심 ․원칙중심․변환적․카리스마․윤리적 리더십 등 현대감각에 맞는 리더십 이론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한국적이면서 현대화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重心)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리더십이 바로 충효예 가치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이라고 보았다. 오뚝이가 바로 일어서려면 무게중심이 하부에 있어야 하듯이, 리더가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의 길로 구성원들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충효예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리더십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인의 리더십 모델을 ‘이순신’, ‘김구’, ‘박정희’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 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지만,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료를 정리한 것이라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과 함께, 李 충무공께서 발휘하신 리더십 기술(동기유발, 의사소통,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 점에 대해서 아쉬움을 갖는다.

  지금으로부터 400 여 년 전, 그토록 어려운 처지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신 충무공 이순신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 님께 누가되지 않을지 조심스런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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