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충효예 리더십

[코로나 19에서 살아남기] 2006. 1. 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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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 리더십

 

Ⅰ. 머리말

 

 

 

Ⅱ. 교육의 관점에서 본 충·효·예의 현대적 해석

 

   1. 민족고유의 ‘정신문화’계승·발전 교육

 

   2. 역사와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윤리’교육

 

   3. 윤리의식에 바탕을 둔 ‘사랑’의 실천 교육

 

 

 

Ⅲ.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전인교육

 

   1. 교육의 본질

 

   2. 전인교육과 충·효·예의 가치

 

   3.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교육방안

 

 

 

Ⅳ.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

 

   1. 리더십의 이해

 

   2. 리더십 이론의 발전 추세에서 본 충·효·예의 가치

 

   3. 교육자와 충·효·예의 리더십

 

   (1) 리더십 발휘 요건

 

   (2) 조직의 운용에서 본 교사의 역할

 

   (3) 리더십 구성요소에 나타난 교육자 위상

 

   (4)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교육자의 리더십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최근 몇 년 동안 ‘교육과 리더십’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실망’ 때문만은 아니고 ‘기대’의 마음도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교육을 문제로 보는 시각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 즉 인간존중과 전인육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고, 리더십을 문제로 보는 시각은 각계 각층에 있는 리더들의 형태(形態)에서 보듯이 도덕적 해이현상 등 언행불일치, 솔선수범의식의 부족현상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리더십이라는 것도 결국 ‘교육’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리더가 육성되어지고, 그 리더에 의해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이니 궁극적인 문제는 교육에 있다고 할 것이다.

 

 

 

  먼저 교육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최근 각종 보도자료를 보면 교육의 ‘세마당’이라는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육을 놓고 ‘어디가 잘못이다’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 즉, 학생·교사·학부모를 놓고 보면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학부모’쪽에 문제가 더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은 이러한 문제를 학교교육과 교사에게만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 일선에 있는 교사의 고통이 매우 심한 것 같다. 예컨대 야간에 과외수업에 매달리던 학생이 수업시간에 잠자다가 선생님이 깨우면 귀찮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의 수업태도, 그리고 시대의 발전추세에 따르지 못하는 각종 교육환경과 교사들의 위상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교사들간에는 담임을 기피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의 궁극적 목표인 ‘전인양성’이 가능할까 우려되는 것이다.

 

 

 

  리더십 분야를 보자. 가정의 리더인 부모, 학교의 리더인 스승, 사회의 리더인 정치·경제·법조·교육·종교계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그중 국가조직을 이끌어 가는 정치지도자들과 공적자금을 한없이 쏟아 부어도 돼지저금통처럼 ‘먹기만 하고 나올 줄 모르는’경제분야 리더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크다. 문제는 이러한 리더들의 모습이 교육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이 시점에서 냉철히 바라보건대 어느 한 분야의 각성이나 몸부림으로 치유될 단계는 지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제반 여건을 놓고 볼 때, 비록 늦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기초와 근본(根本)부터 고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며, 그 방안으로 우리의 정서와 문화적 토양에 맞는 교육과 리더십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여진다.

 

 

 

  UN에서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선포하였다. 우리도 우리 문화의 토양을 바탕으로 교육하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이는 지난 20세기 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말씀, 즉 “한국적 문화, 한국적 철학의 토양 위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충·효·예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충·효·예 정신이 바탕이 된 교육과 리더십에 대하여 그 필요성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Ⅱ. 교육의 관점에서 본 충·효·예의 현대적 해석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충·효·예 정신’은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충·효·예 정신은 “나라에 충성(참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함)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서로간에 예절을 지키는 정신” 또는 “나라를 사랑하는 가정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므로 궁극적으로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교육이며 ‘교육의 목적’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교육법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홍익인간 이념 구현’과 ‘인류공영 이상 실현’이라는 제1조, 그리고 애국애족, 민족문화 계승, 화해명랑(和諧明朗), 근검노작과 무실역행(務實力行) 등 제2조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충·효·예 정신과 교육의 정신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의 관점에서 ‘충·효·예’정신을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해 보았다.

 

 

 

1. 민족 교육의 정신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교육이다.

 

 

 

  충·효·예의 본질과 유래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정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인 동시에 정신문화의 뿌리이다. 한민족의 정신적 부리는 홍익인간 이념이고 그 이념 속에는 충·효·예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익인간 이념의 중요성은 교육법 제 1조, 즉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 자질을 구현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에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교육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문화는 대체로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로 구분하고 정신문화는 다시 가치문화, 규범문화, 관념문화 등으로 나뉜다. 충·효·예 정신은 전통문화이면서 정신문화의 영역이다. 그리고 충·효·예를 ‘하나의 덕목’으로 볼 때는 가치문화에 해당되지만 이를 분리하여 각각의 입장에서 보면 孝는 관념문화, 禮는 규범문화, 忠은 가치문화로 볼 수 있다.

 

 

 

  “관념문화는 높은 수준의 정신문화로서 그 민족 고유의 언어, 사상, 종교, 신앙, 철학 등이 내포된 문화이다. 이 문화에는 그것을 지어낸 민족의 정서가 가장 진하게 깃들여 있어서 쉽게 다른 민족이 받아들여 동화되기가 어려운 문화로 여긴다. 한국의 孝는 도덕적 생활규범이거나 부모에게서 받은 은혜를 의리(義理) 감정을 훨씬 넘어선, 관념문화로서의 종교·신앙으로 지켜져 왔다. 그렇다면 관념문화로서의 孝는 어떻게 실천하도록 교육해야 할까? 孝의 본질적 의미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정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실천방법으로는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식이 잘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면 한 가지의 예(例)로써 소학(小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오늘의 상황에 맞도록 가르치면 될 것이다. 이를테면, [겨울에는 방과 옷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며 밤에는 이부자리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여쭈어 편안하신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밖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다녀오겠다고 여쭈어야 하고 밖에서 돌아오면 다녀왔다고 여쭙고 부모님의 안색을 살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인데 이러한 내용을 오늘에 맞게 교육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孝의 궁극적인 의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시대적 상황 변화에서 오는 것들, 예컨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던 것이나, “부모가 계시면 객지로 가지 않는다(父母在 有必遊方)”는 의미는 현대에 와서 크게 달려졌는데, 이는 부모님의 원하시는 것 자체부터가 달라진 것이기도 하다.

 

 

 

  다음, 규범문화는 정신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생활에 질서를 유지시키는 모든 법률, 제도, 예의, 도덕이 이에 포함된다.2) 규범이라는 의미는 ‘사물의 본보기’, 또는 ‘모범’을 의미하며, 철학적 의미로는 평가, 판단, 행위 등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때문에 禮를 규범문화와 연계한다면 규범의 기준이 되는 ‘가치’로 작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규범문화로서의 禮는 어떻게 실천하도록 교육해야 할까? 禮는 그 본질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행하게 하는 것이고, 도리라는 의미속에는 배려, 사랑, 조화, 질서 등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 실천에 있어서도 ‘답게’하는 자세, 즉 ‘스승은 스승답게 학생을 학생답게’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바르게 인사하기, 질서지키기, 봉사활동 잘하기, 선생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갖기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禮라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낮추고 상대방은 높이는 것(自卑而尊人)”을 겸양지덕으로 생각해 왔지만,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조화와 질서를 유지시키는 차원에서 보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禮不妄悅)’고 하는 자세가 바람직한 禮이다.

 

 

 

  마지막으로 가치문화는 정신문화의 영역으로서 문화인류학자 비어스테트(Robert Bierstedt)에 의하면 정신과 대비되는 개념의 물진문화, 그 위에 법규·관습 등을 포함한 규범문화, 그리고 그 상위의 문화로서 가치문화가 있다. 가치문화란 어떤 조직이나 국가의 이념, 비전, 목표와 개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역할에 대한 신념, 태도 등과 같은 정신과 창조물을 지칭한다. 이런 연유에서 미국은 7대 핵심가치(충성심, 의무, 존중, 명예, 정직, 용기)를 선정하여 적용하고 있고 각 나라마다 상징적인 정신을 내세워 가치문화를 형성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미국의 ‘개척자 정신’, 이스라엘의 ‘선민사상’, 일본의 ‘사무라이’, 영국의 ‘기사도 정신’, 중국의 ‘중화사상’ 등을 들 수 있다.

 

 

 

  忠을가치문화로 보는 이유는 모든 국민이 조국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자기 직분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정신적 목표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忠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미국의 ‘마샬' 장군은 忠에 대하여 “충은 리더가 부하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부하들에게 지시함으로써 억지로 끌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리더의 행동에 달려있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주자‘는 “충은 믿음을 근본으로 삼고 믿음은 충을 불러일으킨다(忠是信之本 信是忠之發)”고 하면서 “충이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盡己之謂忠)”라고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忠의 개념은 오직 자기가 할 일에 충실(正中, 眞心, 盡心, 一心, 誠心, 哀心)함으로써 국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忠 교육은 교육자 자신부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일 것이다. 또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어른이나 군인들만의 임무가 아니다. 학생들도 작은 일에서부터, 예컨대 태극기 게양하기, 공부 열심히 하기, 자신이 해야 할 일 찾아서 하기, 거짓말하지 않기 등을 실천하도록 하면 이것이 곧 忠 교육인 것이다.

 

 

 

2. 역사와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윤리 교육이다.

 

 

 

  충·효·예는 국가윤리, 가정윤리, 사회윤리로 표현되므로 이를 교육과 연계하면 일종의 ‘윤리’교육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윤리 교육의 성격을 규명해 보면 ‘본질과 유래’에서 밝혔듯이 역사와 민족의식, 즉 뿌리의식에 바탕을 둔 윤리 교육으로 보아야 한다.

 

  倫理(윤리)란 사전적 의미로 “사람으로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을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倫’자는 ‘무리 윤’, ‘동류 윤’으로 해석되는 글자이다. 즉, 인륜으로서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과 사람간에 도덕적 관계 또는 도덕적 질서를 가리킨다. 다음 ‘理’자는 ‘다스릴 이’, ‘이치이’로 해석되는 글자로 ‘도리’ 또는 ‘이론’등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질서로서 인간의 도리에 관한 것을 밝혀 주는 것”3)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윤리는 어떤 민족이냐에 따라 그 적용기준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그 원리는 같지만 생활에서는 다르게 적용된다는 뜻인데, 이를테면 서양 사람들간에 느끼는 윤리와 동양사람들간에 느끼는 윤리감각의 기준이 다르고 동양 중에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간의 윤리, 사제지간의 윤리, 이웃간의 윤리 등도 우리들과는 다르게 작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충·효·예를 이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의식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정신이야말로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가치이자 정신의 축(軸)으로 작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왜곡된 역사 부분까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우리 문화보다는 서구의 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우리 문화의 토양 위에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인 컴퓨터의 출현은 인간에게 문명이 이기를 가져다 준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이면에는 무기체계의 첨단화에 따른 파괴력의 증가는 인류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으며, 최근 문제시 되고 있는 자살 사이트, 음란 비디오 및 전화방, 러브호텔 출현 등은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아무리 과학화 시대가 온다해도 윤리교육은 필요한 것이며, 이런 과점에서 볼 때 충·효·예를 교육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윤리규범으로 여겨 온 것을 교육하는 것이니, 일종의 윤리교육으로 볼 수 있다.

 

 

 

3. 윤리의식에 바탕을 둔 사람의 실천교육이다.

 

 

 

  忠은 나라사랑, 孝는 가정사랑, 禮는 이웃사랑의 덕목이나 이를 함축하면 ‘사랑을 실천하는 교육’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 가족, 우리 학교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主成分)이다”라고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가 말했듯이 사랑은 인간의 행동의 주축을 이루고 인간생활의 근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조국애(祖國愛)’, ‘가족애(家族愛)’, 스승과 제자간의 ‘사제애(師弟愛)’등 수없이 많다.

 

 

 

  사랑을 한자로 표현하면 愛(애)이다. 이 愛자는 ‘받을 수(受)’자와 ‘마음 심(心)’이 합해진 글자이니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나타낸다.

 

  사랑은 ‘그리스’어로 스토르게(Storge),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로 표현된다.4) 이 말을 효·예·충과 연계하여 생각하면 ‘스토르게’사랑은 혈족간의 사랑이다. 따라서 부모, 자식간에 피로 맺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니 ‘孝’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리고 ‘필리아’사랑은 우정(友情)이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따뜻한 배려적 사랑이다. 따라서 충·효·예 관점에서 보면 忠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에로스’사랑은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성애(性愛)를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 자연에 대한 사랑, 동물에 대한 사랑, 예술에 대한 사랑, 학교에 대한 사랑등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조국사랑(忠), 가족사랑(孝), 이웃사랑(禮) 정신을 심어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조상들이 간직해 온 홍익인간 정신체 잘 나타나 있다. 홍익인간 정신은 모든 인류에게 유익함을 주는 조건없는 사랑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지역·집단 이기주의가 너무나 만연되고 있다. 예컨대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 대하여 “우리 지역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집단시위를 벌이는 부모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내 손톱 밑은 아픈 줄 알면서 남의 손톱 밑은 아픈 줄 모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윤리성이 결여된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홍익인간 정신의 구현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충·효·예를 교육하는 것은 윤리성에 바탕을 둔 사랑의 실천교육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Ⅲ.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전인교육

 

 

 

  "교육이면 당연히 전인교육을 말함이고, 교육과 전인교육은 동의어였다"5)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은 전인교육의 줄임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충·효·예는 ‘윤리’와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 이는 윤리교육, 즉 사람의 도리를 교육하는 것이다. 때문에 충·효·예가 전인교육의 바탕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교육의 정의, 즉 “윤리적 자극에 의한 자기회복이다(소크라테스)”, “윤리적 목표 달성을 위한 예술이다(마리땡)”,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사이의 만남 또는 상화작용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다(오기형)”, “견실하고 신뢰성 있는 도덕적 인격을 최고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김해린)”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렇듯이 충·효·예 교육은 전인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실상 전인교육에 관하여 연구논문이나 서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필자가 97년도 군사문제 연구기관으로부터 전인교육에 관한 논문발표 요청을 받고 논문 준비차 국회도서관과 국립 중앙 도서관의 논문을 열람해 본 결과 전인교육에 관한 논문은 30여편에 불과했다. 그것도 음악활동과 전인교육, 체육활동과 전인교육 등이 대부분이었고 문화나 정신에 바탕을 둔 전인교육 연구논문은 없었다.

 

 

 

  “전인교육이란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그것과 조화될 수 있게 돕는 문화적 교양 교육이다”6) “한국에서의 전인교육을 논하면서 충·효·예와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김정환)”는 말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온 ‘충·효·예’야말로 전인교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질에 대하여 어원적 접근방법을 통해 생각해 보고 이를 토대로 충·효·예가 바탕이 된 전인교육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교육의 본질

 

 

 

  교육에는 사람이 사람을 가르쳐 키우는 일이고, 사람이 사람이 사람에게 배우면서 자라가는 일이다. 인도 벵갈 지역 밀림에서 발견된 늑대 소녀7) ‘아말라’와 ‘카말라’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동물과 달리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을 배워야만 생존이 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칸트는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만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고 페스탈로찌는 “먼저 인간이 되라. 그래야 훌륭한 石工(석공)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인회는 “인간교육에는 기능인으로서의 교사보다 인격인으로서의 교사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교육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알게 한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정의가 수도 없을 정도로 많고, 또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어원’ 중시이냐, 교육의 ‘유형’중심이냐, 교육의 ‘목적’·‘과정’·‘방법’ 중심이냐에 다라 교육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그래서 “교육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Lester Smith)8)"라고까지 했다. 때문에 필자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봄에 있어서 한자어(漢字語)에 담긴 ‘어원적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교육(敎育)이란 ‘가르친다(敎)’는 의미와 ‘기른다(育)’는 의미가 합해진 글자이니 ‘가르쳐 기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두 글자를 분해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먼저 ‘敎’ 字를 보면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인도할 교(孝)’자와 ‘칠 복’ 자의 합성어로 보는 견해인데 글자에서 보듯이 “회초리로 쳐서 인도한다” 즉 교육자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효도 효(孝)’자와 ‘아비 부(父)’자가 합해진 글자로 보는 견해이다. 효(孝)의 의미, 즉 제자의 입장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듯이 스승의 말씀에 순종하고,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제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셋째는 ‘효도 효(孝)’자와 ‘글월 문(文)’자가 합해진 글자로 보는 견해이다. 제자와 스승간에는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孝)처럼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학문탐구(文)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敎’자가 의미하는 것은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정감어린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인데, 이는 “교회에서 훌륭하게 설교하는 성직자보다도 골방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교육에 있어서는 더 효과적이다. 사랑은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음으로써 익혀진다9)"는 페스탈로찌의 말과 맥을 같이한다.

 

 

 

  다음은 ‘育’ 자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는 ‘아이 돌아나올 돌(돌)’자와 ‘몸 육’자가 합해진 글자이니 “아이의 몸이 엄마 뱃속에서 돌아나올 때의 고통과 정성으로 제자를 기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育’자가 의미하는 것은 제자를 돌 봄에 있어 태아를 열달 동안 잉태했다가 마지막 태아를 출생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산파술이며 진리의 공동생산 작용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산파술의 의미, 즉 아이를 낳을 때 사랑과 정성이 있어야 하고, 산모와 아기를 받아내는 산파간에 호흡이 맞아야 하듯이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에는 상호간에 심리적 작용이 일어나야 교육다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교육과 윤리의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비단 학교 교사들만이 아니라 교육과 관련되는 학자, 교육정책 및 교육행정가, 일선 학교의 행정, 학생, 학부모, 동창과 동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망라되어야 하며 각 계층의 활동, 이를테면 학생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학습행위와 교사가 주체가 되는 교수행위, 그리고 학습행위와 교수행위를 돕는 관리행위의 조화로움 속에서 교육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敎育’의 의미는 교육자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있을 대, 그리고 제자가 마치 부모님을 대하듯 공경심을 가지고 스승을 따를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2. 전인교육과 충·효·예의 가치

 

 

 

  전인교육은 궁극적으로 온전한 사람을 육성하는 교육이고 충·효·예 정신은 나라와 사회·가정적으로 온전한 정신을 뜻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인 면에서 보면 당연히 충·효·예는 전인교육에 있어서 가치로 작용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忠·孝·禮 교육이 전인교육에 어던 작용을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孝를 교육사면 부모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행동하며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예컨대 효경에 이르기를 “효는 덕의 근본이요, 가르침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다(孝德之本也 敎之所由生也)”고 했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아니하며,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愛親者不敢惡於人,敬親者不敢惡於人)”,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어지럽지 아니하며 많은 사람 중에 있어서도 다투지 않는다(事親者 居上不爭, 爲下不亂, 在醜不爭)”고 했고, “효는 3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효는 부모님 뜻을 존중하는 것이요, 그 다음이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마지막 단계가 부모님을 봉양할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孝有三 大孝尊親 其次不辱 其下能養)”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孝의 가치는 전인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둘째, 禮를 교육한다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윤리의식을 함양하는 것이다. 禮의 본질에서 알아보았듯이, 禮는 일종의 사회 윤리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조화와 질서를 유지케 하는 덕목이다. 예기(禮記)에 “예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 도리를 다할 수 없다(不知禮 無以立也)”, “예란 자기를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남을 높여 줌으로써 배려하는 것이다(禮者 自卑而尊人)”, “예는 이치에 맞아야 한다(禮也者理也)”, “사람은 대함에 있어 사랑을 가장 큰 것으로 삼고 사람을 다루고 사랑함에 있어 예를 가장 큰 것으로 삼는다(爲攻愛人爲大 所以治愛人 爲禮大)”, “상관이 부하를 다룰 때는 웃너 먼저 예를 갖추어야 하고 다스림에는 예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爲政先禮 禮其政之本與)”는 등의 문귀에서 보듯이 禮는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남을 배려(易地思之)하는 덕목으로 전인교육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셋째, 忠을 교육한다는 것은 항상 나라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히 하게 하는 덕목을 교육하는 것이다. 忠의 본질에서 살펴보았듯이 忠의 의미는 “곧고 바르게 한다(中正), 정성을 다한다(誠心), 거짓이 없이 정직하다(眞心), 나라와 내가 하나가 된다(一心), 속마음까지 다한다(衷心), 몸과 마음을 다한다(盡心)”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충경(忠經)에 “忠이란 오로지 공에 치우쳐야지 사사로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至公無私)”, “자기 자신의 최선을 다할 때 이르러 충이라 한다(盡己之謂忠)”, “오직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근본이다(惟精惟一 爲國之本)”는 등의 문구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언제나 자기발전은 위해 바른 마음을 최선을 다하는 정신덕목을 키우는 忠 교육은 전인교육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3.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교육방안

 

 

 

‘忠·孝·禮가 바탕이 된 교육’은 인간 질서의 근본을 교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충·효·예를 교육한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정립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는 지식 전달 차원의 교육이 아니라 교육자의 수범이 우선시 되는 교육이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교육법 제1조에 보면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현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규정은 헌법 제10조(행복추구권), 즉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정신을 구체화한 것으로 홍익인간 이념에 근거하여 전인양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충·효·예 정신이 바탕이 된 전인교육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첫째, 충·효·예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선 선생님부터 정확히 알아야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당연 논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부터 알아야 학생에게 느낌을 주고 스스로 다짐을 하게 하는 교육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일선에 있는 선생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학생들이 충·효·예라는 말에 식상해 있다”, “학교의 표어, 어른들의 상투적인 휸계, 국가의 식상한 켐페인 등을 귀에 따갑도록 들었다”고 하면서 반발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충·효·예를 그동안 잘못 알려 준 탓이 크다. 그리고 일부 계층에서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통치자의 묵은 논리를 왜 오늘에 와서 교육해야 하느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이때에 무슨 충·효·예 교육인가?”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어른들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은 본질과 유래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왕조 시대의 충·효·예 사상을 감안하면 조선왕조 시대의 역사(518년간)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 등을 감안한다면 우리 민족의 정신은 고려시대 이전의 충·효·예 정신을 알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교육자 자신부터 알아야 한다.

 

 

 

둘째 “무엇을 교육할까보다 어떻게 교육할 것이냐?”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의 방법은 교육환경이나 여건, 그리고 대상에 따라 달라져야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을 하는 사람의 효성, 예절감각, 충성심 등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교육의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흔한 말 중에 “대학교수이자 교육학 박사학위를 가진 어머니보다도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어머니가 자식교육을 더 잘 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말은 교육내용보다는 교육의 방법 즉, 사랑과 정성을 자식에게 쏟아붓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셋째, 정과교육보다는 생활화 교육, 즉 실천을 중요시해야 한다. 정과교육이란 일과, 즉 수업시간에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이고, 생활화 교육이란 생활 자체를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충·효·예 교육을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에 비유한다면 가정교육 쪽에 해당된다. 즉, 이론이나 지식의 전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모습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모습 자체를 보고 따라 하게 되는 것이 충·효·예 교육이다.

 

 

 

넷째, 교육환경과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충·효·예 교육은 교사 혼자만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교육이 아니다. 우선 먼저 가정에서 부모가 부모다워야 하고 사회의 어른들이 어른다워야 하며 국가 지도자들이 지도자다울 때 충·효·예 교육이 내면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경우, 대부분의 일과시간을 선생님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교사들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지난 96년도에 발생했던 강릉시 여중생 6명 집단 자살사건11)을 비롯해, 학원에서 미리 배우고 학교에 와서는 딴짓거리하는 학생들의 모습 등은 학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학교 외적인 요소들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학교의 문제로 돌리려는 시각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교육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더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있지 않고,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성하는데 있다는 지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전인교육을 표현하면서 “知·德·體와 知·愛·意가 완전히 조화된 인격자를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으로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머리(지적 도야)와 마음(도덕적 도야), 그리고 손(신체적 도야)이 해야 할 것들을 알게(知) 하고, 느끼게(情) 하며, 스스로 다짐(意)하게 함으로써 행동(行)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Ⅳ.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은 한 마디로 ‘리더 자신부터 충·효·예 정신에 입각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윤리성에 바탕을 둔 리더십·사랑을 실천하는 리더십·한국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리더십에 대하여 그 개념을 살펴보고, 이어서 리더십과 도덕성의 관계를 알아본 다음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리더십의 이해

 

 

 

리더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관심사로 연구 발전되어 오고 있다. 그렇지만 한 마디로 “이것이다”라고 정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리더십의 정의는 그 개념을 정의하려고 하는 사람의 수만큼 많다(1974, Stogdill)", "리더십에 대한 조작적 정의는 연구자의 목적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1977, Cambell, 1978 Carmal)"는 말처럼 리더십에 대한 정의가 무려 350여 개나 되고 논문의 수도 10,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지면관계상 리더십의 이론에 관한 학술적인 접근보다는 리더십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일반적인 네 가지의 의미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Leadership을 Leader(선장) + ship(배)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즉 항해 도중에 배가 조난을 당하는 위기에 처했을 경우, 그 선장이 취해야 할 행동을 연상케 하는 의미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LEADER의 spelling에 담겨진 의미로 보는 시각이다. 이를테면 ①L은 listen(리더는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②E는 education(리더는 부하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③A는 assist(리더는 부하들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④D는 discuss(리더는 부하들과 토의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⑤E는 evaluation,(리더는 부하들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⑥R은 response(리더는 부하들의 업무결과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6가지에 대한 리더의 처신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셋째는 리더십을 지휘통솔(指揮統率)의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구  분

 

일반적인 의미

가리키다

 

(손수+뜻지)

휘두르다

 

(손수+군사군)

합치다

 

(실사+채울충)

이끌다

 

(새그물모양 글자)

 

손으로 가리켜서

 

지시한다

손으로 휘둘러 군사를지휘한다

실로 묶어서 합친다.

 

통합한다

새떼의 리더가

 

새를 이끌고 다닌다

 

의미/요구 능력

목표/방향제시

 

부하지도능력

권한과 책임

 

영향력 행사

노력의 통합

 

자원관리

이끌고 나감

 

손선수범

 

관점

忠孝禮

 

바탕

忠 孝 禮 정신에 대한 信賴性

 

정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指)하고 권한과 책임(揮)을 바탕으로 부하의 노력을

 

통합(統)하여 이끌고 나가는(率) 과정

 

 

 

 

 

이는 軍에선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표에서 보다시피 지휘통솔이라는 각 글자의 의미 즉 ‘指’(목표와 방향 제시), ‘揮’(리더 자신의 권한과 책임 행사), ‘統’(부하들의 노력을 통합), ‘率’(부하들을 이끌고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바탕으로 부하들의 노력을 통합하여 이끌고 나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넷째는 “리더십에는 팔로워십(followership)이 포함되며, 특히 팔로워의 역할과 기능을 중시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followership은 리더를 따르는 아랫사람(follower)이 조직의 목표달성을 위해 윗사람을 따르는 능력으로, 조직의 성공 기여도 면에서 팔로워의 비중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인데. 이를테면 “리더가 20%면 팔로워가 80%의 기여도를 가진다(Kelly)”는 것이다. 여기서의 팔로워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군대에서 대대를 기준으로 할 때 대대장은 리더, 중대장과 소대장·분대장은 팔로워라는 뜻이며, 중대를 기준으로 보면 중대장은 리더이고 소대장, 분대장 등은 팔로워인 셈이다. 그리고 시대가 변화되었지만 과거의 리더십은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식의 리더의 역할이 부각되었던 반면 현재나 미래의 리더십은 구성원의 자발적 움직임(Empowerment)을 활용하는 相補的(상보적) 리더십으로 발전되는 추세에 있다.

 

따라서 리더십의 의미를 요약한다면 “리더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부하 또는 구성원의 마음을 움직여 이끌어 가는 과정(process)"이라 할 수 있다.

 

 

 

2. 리더십에 있어 윤리·도덕성의 가치

 

 

 

대체로 리더십 이론이 체계화된 것은 1900년대 초 미국에서부터이다. 이를테면 미국 산업혁명(1860)의 영향에 의해 수공업 조직이 공장산업 조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 생산성 증가와 이윤창출 확대에 따라 경영의 이론과 기법도 아울러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시대로 변화되어 오면서 정신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인간으로서의 도릴르 잃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리더십이론도 인간성 회복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리더십과 윤리·도덕성과의 연관성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리더십 이론의 변천과정에 나타난 도덕성의 중요도이다.

 

구  분

연  대

내용 및 의미

 

특성 이론

1920 ~ 50

우수한 리더는 특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본 이론

 

행동 이론

1950 ~ 60

리더의 해동을 리더십의 중심을 본 이론

 

상황 이론

1970년대부터

리더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행동에 따라 리더십이 좌우되지만 조직생활에 따라 효과성이 좌우된다고 본 이론

 

변환 이론

1980년대부터

리더의 도덕적 가치와 자유·정의·평화 인도주의와 같은 높은 이상에 호소하여 추종자들의 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이론

 

 

 

  * 학자에 따라서는 리더십의 변천과정을 위인이론 → 특성이론 → 행위이론 → 권력·영향력 이론 → 상황이론 등으로 분류하기도 함.

 

 

 

표에서 보듯이 80년대에 와서 도덕성을 포함한, 높은 이성적 가치에 호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에 등장한 Moral Leadership, 가치중심 리더십, 원칙중심 리더십, Empowerment Leadership 등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둘째는 지수(IQ, EQ, MQ)의 선호도 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지능지수(IQ : Intelligence Quotient0에서 감성지수(EQ : Emotional Quotient)로, EQ에서 도덕지수(MQ : Moral Quotient)로 변화되고 있는 성향이 그렇다. 흔히 IQ의 힘은 ‘머리’에서 나오고 EQ의 힘은 ‘가슴’에서 나오며 MQ의 힘은 ‘몸 전체’에서 나온다고 한다. 리더들의 머리의 힘으로만, 또는 가슴에서 나오는 情(정)만으로가 아니라 몸 전체, 즉 솔선수범에 의해 발휘되는 리더십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월남전에 참여한 미군이 보여 준 윤리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월남전 종료 후(1975) 미국의 가브리엘 교수와 스티븐 코비 박사의 주장에 의해 리더의 도덕성과 윤리성이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가브리엘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막강한 전투력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이 소총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하는 월맹군에게 패하게 된 이유는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 장교·하사관 중, 하극상 사건으로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인원이 무려 1,016명인데 이 인원은 전체 사망자(장교·하사관)의 20%에 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극상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리더들이 보여 준 결과주의·충성병·이미지주의·출세주의 등 리더의 도덕성 결핍이 주된 이유였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스티븐 코비는 “미국의 역사 200년 동안 문헌조사를 통해 ‘성공한 인물’에 대하여 조사해 본 결과 남북전쟁 이후 150년 동안은 ‘성실성’이 성공의 주된 요인이었던 반면, 월남전 종료를 기점으로 50년 동안은 ‘처세술’이 성공의 요인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미국이 보다 성실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리더들의 ‘원칙을 중심으로 한 리더십(Principle Centered Leadership)'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있고 나서 미국 당국은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마약·섹스·폭력 등을 포함한 비윤리적인 요소를 추방하기 위해 「윤리와 리더십(ethics and leadership) 연구센타」를 설치하였으며, 여기에서 연구된 결과를 적용했던 걸프전에서는 그와 같은 윤리성 문제가 대두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에 미국에서 발간된 41명의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5가지 평가항복(지도력·위기관리·정치력·인사·도덕성)과 전체 순위를 비교해 보면 도덕성에서 점수가 좋은 대통령이 전체 점수도 좋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실례로 전체 점수 1위에 오른 링컨은 도덕성 분야도 1위였고, 전체 순위 3위인 조지 워싱턴은 도덕성 점수가 2위에 오른 사실 등이 그러하다.

 

 

 

넷째, 세계적인 추세, 즉 각국의 군사교육에도 도덕성이 강조되고 있다. 예컨대 미국 육사는 리더십 목표를 “인격인을 양성하여 국방 분야에 제공하는 것”으로, 독일은 “윤리적 책임과 임무형 전수”을, 일본은 “도덕성에 기초한 국제적 감각과 활동의 개발”등에 두고 있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3. 교육자와 「충·효·예의 리더십」

 

 

 

리더십 이론의 발전추세 등에서 윤리성·도덕성의 중요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리더의 자질 측면에서의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학교에서의 리더 위치에 있는 교사들의 윤리성과 도덕성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필자는 스티븐 코비의 원칙중심 이론에 기초하여 리더십 발휘의 요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어서 「충·효·예 정신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과 관련하여 교육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리더십 발휘 요건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핵심 사안’이 요구된다. 이를테면 분명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리더의 역할이 있어야 하며, 리더와 구성원이 서로 신뢰해야 하고 리더십 발휘에 필요한 환경과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요건을 알아보면, 첫째 리더십의 목표는 상호이해(同欲)에 두어야 한다. 옛말에 “마음만 맞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어떤 일을 할 때 각자의 마음이 일치되어야지만 힘이 모아질 수 있고 시너지 효과로 나오게 되며 능률적으로 과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손자병법에도 ‘上下同欲者勝’, 즉 “상관과 부하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같은 쪽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리더는 항상 부하들이 과업을 이해하고 이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둘째, 리더의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 리더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고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부하들에게 목표와 방향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다. 예컨대 야간에 항해하는 배가 등대의 불빛을 보고 항구를 찾아가듯이, 부하들은 리더가 제시하는 ‘목표와 방향’을 보고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조직을 한 방향으로 정렬시켜야 한다.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상하조직이나 집단의 의견과 뜻이 모아져야 힘을 한 방향으로 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세 번째로 구성원들의 동기를 유발시켜야 한다. “말을 물가에까지 끌고 갈 수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과업에 참여(empowerment)할 수 있도록 관리해 주어야 한다.

 

 

 

셋째, 신뢰성을 확인시켜야 한다. 리더십에서 신뢰성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도표에서 보듯이 신뢰성이 없이는, 리더가 아무리 목표와 방향을 제시한다고 해도, 조직을 정렬하라 해도, 동기를 부여한다 해도 부하들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성에 대하여 스티븐 코비는 “신뢰성에 기초하여 그 두 사람은 명확한 의사소통·공감적 시너지·생산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신뢰성은 “리더의 역량과 성품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리더의 인격·인간성·됨됨이 등 도덕적 가치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역량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또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에 대하여 “대체로 공동체가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생긴다. 신뢰가 쇠퇴하면 그 조직은 직접적인 비용 이외에도 상당한 간접적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며 그 핵심은 도덕성이다. 사회적 자본의 여러 형태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은 ‘가족’이다.  신뢰는 인간이 공통규범을 바탕으로 서로 믿고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넷째,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교육자가 교육활동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학부형·교육행정당국·교사 개인의 사생활 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교육활동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한다.

 

따라서 리더섭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조직운용’의 관점에서 교육자의 역할과 중요성, 그리고 리더십 구성요소에서 생각해 본 교육자의 위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2) ‘조직 운용’에서 본 교사의 역할

 

“조직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생산자, 관리자, 지도자라는 3가지의 기본적 역할 중 한 가지를 수행하게 된다. 조직에서는 3가지 역할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육계에서의 생산자·관리자·지도자는 각각 누구가 해당될까, 아마도 생산자는 교사~교장, 관리자는 재단 이사장~행정 요원, 지도자는 교육감~장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때문에 생산자인 교사는 온전하고 발전 지향적인 학생을 육성하고, 관리자인 재단 이사장은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학습행위를 하는 데 있어 불편하지 않게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지도자인 교육감이나 장관은 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정확하고 바르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에 있어서 주인은 아무래도 생산자 위치에 있는 교사(스승)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관리자와 지도자를 양성하는 역할이 바로 교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에 있어서는 오메가도 교사요, 알파도 교사”라고 한 것이다.

 

 

 

(3) 리더십 구성요소에 나타난 교육자 위상

 

리더십의 구성요소는 리더(교사)·부하(학생)·환경(상황)이다. 그런데 “리더가 구사하는 리더십은 그 리더의 의식과 사고(思考)에서 나온다”고 했듯이 리더인 교사에 의해서 교육환경과 학생의 태도가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 말씀보다도 메스컴이나 동료들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성향이 더 많아질 정도로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학생은 연예인이나 프로선수들의 생년월일, 기호품 등을 포함하여 그들의 신상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가친척이나 선생님 등에 관해서는 전혀 모른다. 심지어 부모님의 함자를 한자로 쓸 줄 모른다거나 생신일까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한 마디로 부모나 교사의 영향력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따라서 최근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리더십의 구성요소별로 나타나는 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해결 방안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교사와 임무수행과 관련된 내용을 보자.

 

<선생님에게 제 자리를>

 

98년, 일본의 한 소도시 중학교 교실에서 대낮 살인사건이 벌여졌다. 26세의 여교사가 수업에 지각한 남학생에게 주의를 주자, 남학생이 “까불지마” 하며 갑자기 칼로 여교사를 찔러 숨지게 한 것이다. “학교가 이 지경까지…”란 충격과 탄식이 일본열도를 휘감았다.

 

‘벼랑 끝까지 간’ 학교의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학생들간의 싸움에 해를 입은 학부모가 교장과 담임교사의 월급을 가압류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얼마 전 서울의 모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가 자신의 아들을 꾸짖은 교사를 교실로 찾아가 뺨을 때린 일이 벌어졌다. 어느 사이, 우리 사회는 교사가 체벌을 한다는 이유로 제자가 스승을 경찰에 신고해도 놀라지 않는 세상으로 변했다. 어느 중학교 교장은 교육부 홈페이지(www.moe.go.kr)에 교육현실을 개탄하는 글을 올렸다.

 

『교육이 무엇인지 몰라도 교단에서 열심히 뛰면서, 가르치는 일이 즐거워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면서,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밤과 낮을 가리지 않으면서…(중략) ‘날개죽지가 꺾여 기가 빠진 학교장도, 맥이 빠져 풀이 죽어 있는 교사도, 고삐 풀린 망자지처럼 제멋대로 된 겁 없는 학생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뾰족한 대안은 무엇인가.’』세태(世態)가 갈수록 삭막해져도 ‘선생님’이란 세 글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는 척이라도 했던 게 지난날의 풍속도였다.

 

80년대까지 교육여건은 비참했지만, 학생들은 교사의 말에 순종했고, 사회적으로도 교사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풍토가 있었다.

 

그래서 교사들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교단에 선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물리적 환경은 상대적으로 좋아졌지만,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하는 심리적 환경은 최악으로 황폐해졌다. 지난날, 천막교실이나 과밀학급의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기본적 인간관계로 유지됐던 사제(師弟)간의 끈끈한 정(情)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얼마전 명예 퇴직한 한 50대 초반의 한 교사는 “이젠 버르장머리없는 아이들을 더 이상 안 보게 돼 후련하다”고 사석에서 실토한 바 있다.

 

최근 전교조가 실시한 ‘학교붕괴 현상에 대한 교육주체의 의식조사 연구’ 조사결과는 교권(敎權) 붕괴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수업을 할 때 학생들로부터 교사의 권위를 존중받고 있는가’ 하느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교사는 17.7%에 불과했고, ‘그렇지 않다’고 답한 교사는 50.5%나 됐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는가’ 문항에는 ‘그렇다’가 34.9%인 반면, 41.9%는 유보적인 태도, 22.6%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학교 바로세우기 실천연대’(학실련)가 지난 9월 교원, 학생, 학부모를 상대로 실시한 ‘학교 공동체 문제상황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학교엔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답한 경우가 교원은 49.6%, 학생은 32.5%나 됐다.』

 

아슬아슬하게 지켜 오던 선생님들의 권위는 최근 1~2년 사이 급격히 추락했다. 선생님들은 ‘스승’의 입장에서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로 위상이 격하됐다. 1년 중 가장 보람을 느껴야 할 ‘스승의 날’은 ‘촌지 받는 날’인 양 매도됐다. 급기야 정년단축의 충격파까지 밀어닥치자 교사들은 ‘정떨어진’ 교단을 서둘러 떠났다. 스스로 선택해 학교를 떠난 명예퇴직 교사가 2만여 명에 이른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중략)

 

이제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빼앗았던 교사들의 권위를 되찾아 줘야 할 때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다. 교권이 바로 서고, 선생님들이 제자리를 찾지 않고서는 백년지계(百年之計)인 교육이 바로 설 수 없다.

 

 

 

<학원에서 미리 배우고 학교에 와서는 딴짓거리>

 

작년 11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서울 강남의 A초등학교로 전학시킨 학부모 이모(43)씨는 아이가 학교를 며칠 다닌 뒤 하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학교가 이상해요. 애들이 공부시간에 떠들고“노래하고 장난쳐도 별로 뭐라고 안해요.”

 

이웃 학부모를 통해 그 까닭을 알게 된 이씨는 더욱 놀랐다.아이들이 방학 등을 이용해 사설 학원에서 교과진도를 미리 배워오기 때문에 수업시간에는 딴 짓들을 한다는 얘기였다.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에게 초등 1학년 교과가정을 미리 가르친 학부모 김모(여·41)씨는 얼마 전 동네 반상회에서 같은 처지의 학부모들을 만나고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눈치 빠른 주부들은 이미 2~3학년 과정을 가르치고 있던데 큰일날 뻔했지 뭐예요.”

 

이처럼 학생들이 사설학원 수강이나 과외를 통해 교과과정 진도를 앞지르는 바람에 일선 초등학교 수업분위기가 갈수록 산만해지고 있다. 서울 강남 일대의 초등학교는 한 반에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보습학원 등을 이용한 사교육을 통해 교과과정을 미리 공부하고 있다는 게 교사와 학부모들의 이야기다.

 

이로 인해 수업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이 정상적인 학교교육만으로 학습하는 정상적인 다른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까지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M초등학교 교감은 “학부모들이 앞다투어 학과진도를 앞지르기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학교 공부가 쉽다고 느낀 학생들이 집중하지 않고 짝과 떠들거나 다른 짓을 하기 일쑤”라고 말했다.한 6학년 담임교사는 “중학교 과정을 미리 배운 아이들끼리 칠판에 인수분해 공식을 적으며 자랑하는 것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공교육을 보완해야할 사교육이 오히려 공교육의 권위를 해치고 있다”고 말했다.(중략)

 

일선 교사들은 학교 공부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시험점수가 높아도 학교공부에 충실치 못한 학생은 인정해 주지 않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중략)

 

지난해 4월 경기 K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었던 M교사는 수업시간에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가정통신문을 찟는 등 말썽을 부리던 K군에게 주의를 주다가 “자꾸 그러면 아예 집에 가라”며 꾸짖었다. 그 아이는 즉시 집으로 가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고 K군의 아버지는 수업중이 M교사와 교감에게 폭행·폭언을 퍼부어 사건은 경찰 수사로까지 비화됐다.

 

한 여고생이 체벌을 가하던 교사를 휴대전화로 112신고를 했다는 얘기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던 지난해, K교사(50)는 수업시간에 주의가 산만한 학생을 앞으로 불렀다. 여학생은 걸어 나오며 급우들을 향해 말했다. “누구 핸드폰 가진 사람 없니?”(중략)

 

 

 

 

 

둘째, 현재 학생들의 모습을 조명한 사례를 보자.

 

 

 

우리의 교육풍토가 이처럼 어렵게 된 데에는 가정교육의 소홀함 때문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 동안 우리 나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즉 일제 35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6. 25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 조국 근대화 산업화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잘살아 보자’에 치중한 나머지 ‘바르게 살아 보자’는 노력은 다소 미흡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정교육에 있어서도 자녀교육을 학교 선생님께 미룬 채 돈 버는 데만 치중한 부모의 역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한국의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에 등한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일제치하 35년’의 교육정책을 탓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일제 당시 ‘사이또’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모든 교육은 학교에서 하는 것이니 자녀를 모두 학교로 보내라”고 하면서 모든 학교교육에서는 일본인 교사에 의해 일본인을 양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고, 이러한 일본인들의 저의를 알지 못한 한국의 부모들은 이때부터 자식교육을 학교에서 하는 것으로 알게 되는 우(愚)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상기 사례와 같이 교육의 욕심은 많으나 자녀를 진정으로 보살피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일어나는 가정교육의 부재현상이 학교 교육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선 학교의 자정운동>

 

‘교실 붕괴’ 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가운데, “교실을 바로 세우자”는 반성과 姿情(자정) 운동이 일선 학교에서 번져 가고 있다.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무모-학생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교실붕괴를 맞기 위한 지혜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가본다.

 

S고 강당에서 교육부 장관이 참관한 가운데 학생, 학부모, 교사 300여 명이 ‘교실 모습 이대로 좋은가’란 주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교사, 학생, 학부모는 ‘갈 데까지 간’ 교육현실을 개탄하면서 마음 속의 허심탄회한 얘기들을 쏟아냈다. L교사가 무너지는 교실의 실태를 낱낱이 고밣자, 강당 안은 죽은 듯이 숙연해졌다.

 

『“교과서 등 교재를 준비하지 않는 학생이 수두룩합니다. 상습적으로 무단결석이나 지각하는 학생이 늘고 있어요. 늦게 나와 아무 때나 집에 가 버립니다. 수업 중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려라’는 식의 ‘막가파’ 학생도 한 반에 적어도 5명은 됩니다. 이런데도 체벌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교사는 “얼마 전 퇴임한 선생님이 오죽 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지 않아도 돼 정말 가슴이 후련하다’고 얘기했겠습니까?”하고 질타했다.』

 

 

 

다음은 1학년 L(17)군.

 

『“수업시간에 3분의 1 이상이 잠을 잡니다. 또 나머지 절반 이상이 만화책을 보거나 휴대전화로 장난을 쳐요”, “정상적으로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 다수의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의해 ‘범생’으로 놀림받고 오히려 바보스럽게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가치관 혼란을 겪고 있다”』고 무절제한 동료 학생들의 행태를 꼬집었다. 2학년 학생회장인 P(18)군은 『“수업시간에 배우는 과목이 현실이 떨어지는 것도 학생들이 외면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한 뒤 “학생들이 수업을 방해해서는 안 되지만 선생님들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부모 O씨는 『“아이들이 버릇없고 제멋대로 된 데는 부모들의 잘못이 큰 만큼 가정교육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교육부의 서투른 교육개혁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이어졌다.

 

『“수행평가에서 보듯, 교육부는 교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정책을 세우고, 전시용으로 포장된 번지르르한 결과만 가지고 판단한다.”』(학생), 『“학교 현장을 지키는 교사의 의견을 반영하기는커녕 교사를 개혁대상으로 삼고, 학교 현실을 앞질러 가는 개혁으로 불신의 골만 깊게 만들었다.”』(교사), 『“정권이 바뀌거나 장관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달라져 우왕좌왕하는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혼란스럽고 당혹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학부모)

 

Y교장은 “이번 모임이 교육에 있어 무엇이 문제인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중략)

 

 

 

 

 

셋째, 교육환경에 대한 사례를 보자.

 

 

 

우리의 교육이 이처럼 어려움에 처하게 된 데에는 ‘교육의 근본’에 소홀했던 탓에 있다. 다시 말해서 교육의 세 마당이라는 「가정-학교-사회」가 삼위일체가 되어「知-德-體와 知-情-意」의 조화 속에 교육을 추진하는 데 있어 ‘교육환경’, 즉 교육의 조건에 다소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교육 조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땅 속에 지뢰가 잔뜩 묻힌 황야와 같다.”라는 말처럼 우리 나라의 교육 환경은, 미래의 교육에 대한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채, 리더가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고 그러한 정책은 불신으로 이어져서 논쟁의 불씨를 만들어 내는 격이 되고 있다. 비근한 에로 입시교육제도만 보아도 그렇다. 수시로 정책을 내놓지만 신뢰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교육현장의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들마저도 상처받게 되며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불안해진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직접 판단하기 위해 더 많은 측정 기준을 제시하고 요구하게 되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만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사와 교육행정관들은 사기를 잃게 되는데 이러한 환경은 결과적으로 학생의 고통을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육 환경 조성은 현시점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4)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교육자의 리더십

 

앞에서 제시된 3개의 사례는 필자가 모은 수십 개의 사례 중의 일부이다. 사례에서 보듯이 교육의 주체인 교사,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 교육정책 당국에 이르기까지 문제점을 잘 지적한 사례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를 해결할 것인가? 이러한 모습들은 참으로 그 해결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근본과 바탕에서부터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현장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지난해 고3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마친 상태에서 초빙강사로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교사라는 자리가 이렇게 어려운 자리이구나’를 느꼈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스승의 날 일일교사로 교간에 서 보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이는 기본부터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우선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설과 칼럼의 제목 중 교육과 관련한 내용을 보며, <교육이 무너지니 조기유학 떠나지…>, <열린 교육에 바람든 아이들>, <교육부부터 변해야 한다>, <교육방임이 학교붕괴 불렀다>, <때리는 교사, 신고하는 학생>, <학생 눈치봐야 하는 교사>, <교육부 무용론>, <도장만 찍는 봉사활동 소용없어요>, <교권침해 심각, 걸핏하면 폭언·폭행 당해>, <‘어린 영혼’짓밟는 ‘검은 상혼’>, <중·고생 모셔라, 기업들 경쟁치열>, <음반회사 안 망하려면 댄스 음악 만들자>, <대학생들이 교수 집단폭행>, <학교가기 겁난다>, <10代가 밥줄인 이동전화업체>, <수업중인 女교사 발로 차 실신시킨 막가는 학부모> 등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신문의 활자들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총체적인 문제로 보인다. 때문에 교육에 관련된 지도자·관리자·생산자·학생에 이르기까지 충효예 정신으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교육의 현장에서 본연의 사명을 다하시는 어떤 선생님의 사례를 본다.

 

<훌륭한 선생님 많습니다>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통지표 하단에는 ‘학교에서 가정으로’라는 가정통신란이 있다. 가정통신란은 담임교사가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 전달수단이지만,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 중의 하나다. 해동이나 학업성적이 특별한 학생에 대해서는 쓸 말들이 금방 떠오르지만, 특징이 없는 학생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몇 가지 종류의 문안을 만들어 놓고 컴퓨터로 뽑아 풀로 붙여 가정으로 보내는 선생님도 있다.

 

얼마 전 1학년 담임 선생님 한 분이 와서 “교감 선생님, 가정통신란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는데 그냥 도장 찍어 주시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다. 평소 모범적인 선생님이라 무슨 일이냐며 의아해 되물었더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 “따로 준비했어요”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학급의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께 보내는 글을 예쁘고 아름다운 색지 한 장 한 장에 사랑을 가득 담아 정성스럽게 써 놓은 것이었다.

 

<준이 보렴, 입학식이 끝나고 뒤늦게 상기된 얼굴로 엄마와 함께 왔던, 그래서 교과서도 없던 준이 생각이 난다. 준이가 낯설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반에 복덩이가 들어온 거였어. 2학기 임원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속으론 섭섭했겠지만 표정 나타내지 않고 제 할 일 해주고 임원 아이들과 잘 지낸 점, 재미있는 지도 그리기, 땅따먹기 게임 등 준이 덕에 우리 반 남자 아이들이 더 멋있어졌는지도 모르지…>

 

<준이 어머님께. 준이를 보면서 늘 어머님을 떠올렸습니다. 공부든 뭐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서, 언제부턴가 사람됨을 강조하는 모습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분노를 얼굴에 나타낸 적도, 친구와 다툰 적도, 누구를 원망하는 흉한 말 한 마디 들어 본 적이 없답니다. 정말 잘 키우셨습니다. 준이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튿날, 진로상담을 맡아 학부모님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다른 1학년 선생님이 통지표를 가져왔다. 그 통지표 가정통신란에는 2학년에 진급해서 해야 할 일들과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글이 예쁜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다.

 

<철이 아버님과 어머님께. 나뭇가지에는 새순이 돋아날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1년 맡아서 나름대로 온전히 2학년이 되게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력했는데 흡족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쳐 하지 못한 일거리들을 부모님께 부탁드립니다.

 

2학년 때 도와 주실 일들

 

1) 봉사활동, 겨울방학 전까지 다 하는데 3월부터 여유롭게 조금씩 하기. 2) 한국고전문학 읽기, 신문 읽기 등 독서지도. 3) 2학년부터 출석·봉사 내신성적이 진학에 반영되므로 학력에 성의를 갖고 최선을 다하기. 4) 학교를 믿고 담임선생님께 사춘기 변화나 어려움을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

 

아울러 제가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므로 글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건강하시고, 1년 동안 담임교사인 저를 믿고 아이들을 맡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학년 말에 누가 어떻게 하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학생들을 내 자식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과 정이 넘치는 글을 보내는 훌륭한 선생님들. 이런 분들과 함께 일하는 내가 무척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중략)

 

 

 

 

 

사례에서 보듯이 결국 지금과 같은 어려운 교육환경을 극복하는 길은 인륜질서의 근본에서 찾는 길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과 정성(孝), 교육자와 학생으로서의 도리(禮), 직분에 충실하는 참된 마음(忠)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충·효·예 정신은 곧 근본이기 때문이다. 근본을 세운다는 것은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그 다음도 튼튼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인가. 가정·사회·국가를 위해 반듯한 사람이 되는 것부터가 근본이다. 따라서, 제자들로 하여금 부모님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알고 학생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며 국가장래를 책임져야 할 젊은 학도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교육이 충·효·예에 바탕을 둔 교육이요, 전인교육이다. 이야말로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교육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장차 부모가 되었을 때 그들도 또한 근본부터 세우는 교육이 중요함을 알도록 해야 한다.

 

여기 21세기를 맞이하여 어느 선생님의 소박한 희망이 담겨진 글을 옮겨 본다.

 

<새학기를 바라는 마음>

 

지난해 어느날 5교시, 여느 때와 같이 3학년 수업에 들어갔다. 숙제검사를 한 뒤 수업을 시작하는데 숙제를 해오지 않은 U군과 L군이 키득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수업에 방해가 되니 떠들지 말라고 지적하자 “떠들지 않았는데요”라며 즉각 말대꾸를 한다.

 

‘오늘이라고 다르겠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아졌고, 수업도 엉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되는데…. 즐겁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자’는 생각에 마음을 담았다. 준비한 컴퓨터 영상 자료들을 보여 주며 즐겁게 수업을 진행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수업중에 떠드는 학생을 지적하면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고 미안해하기보다는 항변 아닌 항변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다른 학생도 떠들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란 식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볼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꾸중하는 노하우가 없어서일까.

 

새해가 밝았다. 3월이면 또 새로운 학생들과 만난게 된다. 바라는 것은 급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배려하는 학생들이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떠들면 수업에 방해가 되고 친구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지. 교실 바닥에 침을 뱉으면 모두가 기분 나쁠꺼야. 욕하면 듣는 친구가 화날거야’ 란 생각을 할 줄 아는 학생말이다.

 

스스로도 학생들의 생각의 깊이와 눈높이에 맞춰 함께 유쾌하게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사제의 정이 흐르는 교실을 만들어 가고 싶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의 영역이자 윤리와 사랑의 가치인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힘은 교육에 의해 육성되지만 리더십에 의해 발휘된다”고 한다. 이러한 例(예)는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월남전’에서 극명하게 입증된 바 있다. 즉, 장개석 군대나 미군은 모택동 군대나 호지명 군대에 비해 전투력은 월등히 앞섰지만 전쟁에서는 결국 패했다. 때문에 교육도 중요하지만 리더십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지난 97년도에 들이닥친 IMF의 한파는 따지고 보면 각 분야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고, 또 그 이전에는 그러한 리더를 길러낸 교육에 문제가 있었으며 그 밑바탕에는 윤리성과 도덕성의 결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근본을 세우는 교육과 리더십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첫째, 한국적 문화와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가치’ 중심의 교육과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서양의 것을 배척하거나 貶下(폄하)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강조했던 ‘동도서기 사혼양재(東道西器 士魂洋才)’의 기조 위에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교육법에 명시되어 있다시피 교육의 목표(홍익인간 이념)에 충실해야 하고 전인양성에 치중해야 한다. 요즘처럼 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청학동 한문 서당에서 ‘충효예’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아이교육을 위해 외국이민을 택하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는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외국에 나가 있어서 이산가족의 상태로 비정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 학생은 외국의 낯선 환경에서 얼마나 고생을 할 것이며 이러한 상태로 성장한 학생이 과연 가정과 조국을 어느 정도로 고마워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셋째, 원칙에 입각한 리더십이어야 한다. 원칙에 입각한 리더십은 리더 자신이 리더이기 이전에 온전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온전한 인간에게서 온전한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은 바로 근본이다. 일찍이 선각자들은 근본을 중시하였다. ‘유자’는 논어에 이르기를 “근본이 서면 길과 방법이 생기니, 모름지기 리더는 근본을 세우는 데 힘써야 한다(本立而道生 君子務本)”고 했고 ‘마융’은 충경에서 “근본이 선 이후에 교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本立以後化成)”고 했으며,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무리 법령을 많이 만들어서 인간에게 적용한다 해도 도적은 더욱 많아지고(法令滋彰 盜賊多有) 백성들에게 해서는 안 될 금령을 많이 요구하지만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진다(天下多忌諱 而民양貧)”라고 했다. 모두가 근본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함을 강조한 말들이다. 이처럼 근본과 원칙이 통하는 리더십이어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오늘날과 같이 교육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에 대해서 일제 통치 35년의 영향(예 : 사이또의 교육시책 등) 때문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일제 35년간 일본인들이, “모든 교육은 학교에서 실시되는 것이지 가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자녀를 학교로 보내라” 하면서, 국민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모든 학교는 일본인 교사로 채운 채 일본인을 양성하는 교육만을 시켜왔는데, 그 때문에 현재 한국 부모들은 자식을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마저 학교에 맡긴 채 교육에 방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녀교육을 위해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부모들이 외국 선생님과의 자녀문제에 대한 상담에서, “선생님, 제발 우리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당부하는 현상이 매스컴에 보도된 적이 있다.

 

 

 

결국 이런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서야 하고 교육은 민족의식, 뿌리의식의 한국적 가치의 토양에 서양의 과학 문명을 접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교육환경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정신과 사상을 더욱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통일을 대비해야 하는 민족적 숙원사업에 관한 준비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독일이나 월남 등이 정치‥경제 등 외형적 통일은 이루었으나 문화·사회 분야 등 내면적 통일을 이루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도 통일을 향한 민족 공동체 의식 회복 등 교육을 통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임을 고려해 볼 때 상고시대부터 지켜서 온 우리 민족의 가치인 충·효·예 정신을 우리부터 내면화하고 나서 북의 동포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정립해 나가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때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김종두, 서울시 초, 중, 고교 인성교육 지도교사 워크숍 강의 교재, 월간 충효 2000년 4월/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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