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칠백의총의 리더십

[코로나 19에서 살아남기] 2006. 1. 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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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총(七百義塚)과 만인의총(萬人義塚)에서 본 리더십

 

 

 

충효예 교육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사람(군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게 하는 교육”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효예 정신을 우리의 전통적 기본윤리와 생활규범으로 삼고, 4백여 년 전 임진왜란을 통하여 겪어야 했던 칠백의총(七百義塚)과 만인의총(萬人義塚)의 사례를 통해 우리민족의 고통과 일본인들의 만행을 상기해 봄으로써 민족의 혼(魂)을 되살리고 역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忠이란 오직 나라를 위하는 참된 마음(唯精唯一 爲國之本)으로 자기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盡己之謂忠) 덕목이다. 그리고 대의명분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칠백의총의 의병장 조헌의 모습, 경계근무를 잘하는 경계병, 그리고 맡은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간부의 모습 그 자체가 바로 忠이다. 그렇기 때문에 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이율곡 선생과 같은 선각자는 왜군들의 침략을 예견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리당략과 현안분쟁에 눈이 어두었던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묵살하였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임진년의 ‘칠백의총’과 정유년의 ‘만인의총’이라는 결코 잊어서도 안되고 잊을 수도 없는 역사적 사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목숨바쳐 나라를 구했던 ‘칠백의총’과 ‘만인의총’에서 그 분들의 충절을 본받는 것이다.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충남 금산에 위치한 ‘700 의병을 한곳에 모신 무덤’의 이름이다. 이는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년) 의병장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 등이 이끄는 의병 700 여명이 8월 18일(음력)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원이 순절한 사건이다. 훗날 지역사람들이 시체를 한 무덤에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9월23(양력)에 그 분들의 의로운 넋을 기리고 있다.

 

  왜군은,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 파죽지세로 각 지방을 유린하면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이미 서울을 함락하고 두패로 나누어 함경도와 평안도를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정황속에서 선조대왕은 압록강 연안의 의주로 몽진(蒙塵 : 임금이 나을 피함)하였다. 이 때 조헌 선생은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한 뒤 의주에 피신중인 선조대왕을 호위할 목적으로 온양을 거쳐 의주를 향해 북상의 길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충청도 순찰사 윤석각이 “왜적이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고 금산에 집결하고 있으니 관군과 함께 금산의 왜적을 무찌른 다음 의주로 갈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조헌 선생은 발걸음을 돌려 유성을 거쳐 8월 11일 금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합세하자던 윤선각의 관군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지 못하였다. 결국 조헌 선생과 칠백 의사들만이 변변치 않은 무기와 맨주먹으로 조총으로 무장된 15,000명의 왜적과 맞서  최후까지 격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8월18일 새벽을 기해 왜적이 세 방향에서 포위하여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칠백 의사들은 적을 세번이나 격퇴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저녁무렵이 되면서 화살도 떨어지고 피로도 겹쳐 왜적과 창검으로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사력을 다한 싸움이었지만 끝내 창검마저 꺾이고 부러져 맨주먹으로 혈전을 치루게 되었고, 그 결과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옥쇄하고 말았다.

 

 

 

  그 후 십여년이 지난 1603년에 금산 일대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조헌 선생을 위시한 칠백 의사들의 위훈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제향을 모시기 시작하였으며,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라는 제사(題詞)를 내리셨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항일유적 말살정책을 실시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칠백의총과 종용사를 헐고 순의비를 폭파시켰다. 뿐만 아니라 제터 마저도 강제로 매각해 버림으로써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8. 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이곳 유림들과 주민들이 의총을 다시 보수하고 종용사와 순의비를 재건함으로써 재향을 다시 받들게 되었다.

 

 

 

  그 후 1963년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로 수차에 걸쳐 경역을 다듬어 왔다. 특히 1976년에는 분묘와 종용사를 새롭게 단장하고 기념관, 한글순수비, 칠백의사 순의탑, 관리소 등을 신축하였으며 주차장, 경내 배수시설 및 주변 임야의 녹화사업에 이르기까지 경역 전반에 걸친 조경 사업을 다시 한 결과 성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700여명의 의병을 이끌었던 조헌 장수의 충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의병장 조헌(趙憲)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선비의 신분으로 일찍이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여 조국을 수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애국적인 상소(上疏)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탄하기를 “그대들은 왜적이 침입하면 산골로 도망치게 될 것이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뜻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도끼를 가지고 임금님께 상소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정세는 일본의 ‘풍신수길’이 전국을 통일한 여세로 명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비키라는 교섭을 해올 때이다.

 

 

 

  이때 나라에서는 국론이 분열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나 나라 일을 예견한 선생은 자기의 도끼로 왜국 사신의 목을 베고 국토방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광론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은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한탄하여 궁궐 주춧돌에 이마를 부딪쳐 유혈이 낭자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기까지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헌 선생의 충절은 당파를 초월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맨 주먹으로 향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의병대장이 되어 청주성(城)을 수복하고, 금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전세가 위급해지자 그 부장이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대장부가 국난을 당하여 마땅히 죽음이 있을 뿐인데 어찌 구차스럽게 삶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외치면서 적을 무찌르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듯 칠백의총에 잠들어 있는 칠백의사의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감투정신(敢鬪精神)과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에서 조헌 장수의 충절이 담겨진 리더십을 찾아 볼 수 있다.

 

 

 

  만인의총(萬人義塚)은 전북 남원에 위치한 민·관·군 일만명을 한곳에 모신 무덤의 이름이다. 이는 정유재란 중인 1597년(선조 30년) 8월 14일과 15일, 양일간에 걸쳐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원이 옥쇄한 사건이다. 매년 9월 26일(양력)에 그 분들의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를 올리고 있다. ‘만인의총’의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에서부터 시작된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5년여 동안 국토가 황폐화되고 있을 즈음인 1597년 8월 14(음)일 ‘풍신수길’은 56,800여명의 병력으로 남원성(城)을 공격 해왔다. ‘풍신수길’이 남원성에 대하여 집요하게 공격하려 했던 내면적인 이유는 4년여 동안의 전쟁으로 물적, 재정적 손실에 따른 군소(群小)영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어린 아들에게 대권을 물려줄 시간을 벌기 위한 방편과 반란 가능 세력을 사전에 제거할 목적 등 복합적인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임진왜란 초기에 큰 화를 입지 않은 전라도에서의 의병활동과 군량 및 무기공급이 자칫 조선군의 전세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1597년 8월 7일 구례에 도착한 왜군 선봉 ‘괘시’ 부대는 8월 9일 숙성령에서 의병장 박계성과 전투를 벌이는 등 간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12일 왜군의 주력인 ‘소서행장’의 부대가 주천면 장안리에 도착,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남원성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였다.

 

  이때 남원성을 수비하고 있던 군사는 명나라 군 3,000여명과 조선 군 1,300여명 등 4,300명에 불과하였다. 8월 13일 남원을 공격한 왜군 56,800명으로 인해 10배가 넘는 적과 싸우게 된 남원의 민. 관. 군 일만여 명은 혼연일체로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일 수밖에 없었다. 8월 16일 마침내 적들이 남문을 부수고 몰려들자 명나라 군사들마저 혼비백산하였다. 극도로 불리한 여건에 놓이게 된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 군과 성안의 모든 관·민이 전사하고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실록(선조 30년 8월)에 의하면 “남원주변의 주민과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참전하여 많은 왜군과 용감히 싸워 충절을 다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원 성(城)이 함락되자, 왜군은 무인지경으로 전라도를 점령하였으며 충청도 직산까지 북진하게 되면서 급기야 세자와 중전이 피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짐승만도 못한 왜군은 그 지역에서 이른바 ‘코베기’ 만행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고 도공을 비롯한 각종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죄없는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포르투갈 등에 당시 돈 2원을 받고 노예로 파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의 만행을 증언한 기록은 남원지역 4대 고전 중 하나인 紅緋傳(홍비전), 崔涉轉(최보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왜군의 만행과 백성의 아픔을 잘 알 수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북 남원시 만인의총 관리소 제공)

 

ㅇ남원성 싸움에서는 대량살육과 ‘코베기’가 자행되었다. 살육 상황은 당시 왜군의 종군 승려였던 경념(慶念)의 일기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1597년 8월 17일 : 남원성내의 남녀노소는 무참하게도 모조리 참살되었다

 

  1957년 8월 19일 : 날이 밝아 남원성 밖을 보니 길가에 죽은 사람이 산더미같아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ㅇ남원성에서 자행된 코베기는 풍신수길이 보낸 감사장과 남원출신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월 16일 보고서를 보았다. 전라도 남원성을 둘러싸고 16일에 함락시키고…. 상대편 목 269개를 쳐서…. 그 코는 풍신수길 앞으로 도착했다.

 

 

 

  조선 지휘관의 목은 그대로 보내지고 병졸은 그 코를 베어 소금과 석탄을 뿌려 항아리에 넣고 남원의 평면도를 그려 풍신수길 앞으로 보냈다.

 

 

 

  풍신수길은 …조선민중을 몰살하여 조선 국토를 공지(空地)로 만든다고 한다. 코를 베어 목으로 대신 한다고 했다. …왜군은 죽은 사람의 코는 물론 살아있는 사람의 코까지 베어 조선에는 오랜동안 코없는 사람이 많았다. -조경남 <亂中雜錄>-

 

 

 

 

 

 

  특히,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수많은 문화유산을 침탈하고 도공을 납치해 갔다. 그중 일본 사가현 아리따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李參平)을 비롯한 기술자 150여명과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로 끌려간 박평의(朴平意)등 43명의 도공 등 수많은 기술자들은 오늘날 일본의 도자기 공업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 이삼평은 아리따야끼의 도조(陶祖)로 일본 도자기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박평의 등은 사쓰마야끼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의 양대산맥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가고시마로 끌려간 도공들은 고향땅 남원을 잊지 못해 단군사당(玉山官)을 짓고 매년 남원성이 함락된 8월 16일에 우리 식으로 제례를 올리며, 고향에서 부르던 ‘오늘이 오늘이소서’노래를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랜다고 한다. 이 노래는 오늘날 우리는 잃어버렸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옛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칠백의총과 조헌 선생의 리더십 : 조헌 선생의 삶을 孝와 禮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자. 선생은 일찍이 이율곡 선생의 문하에서 충효의 도(道)를 수학하더니,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 하였다. 상소를 여러번 올려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을 것을 진언하여 곧은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했을 뿐 아니라, 국난을 당하자 바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충성심은 그야말로 신념이며, 그의 행동의 전부이기도 하였다. 때로는 직언이 너무 과하여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박해를 당한 일도 있었으나 이에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언제나 대의를 내세웠으며 탐관오리(貪官汚吏)와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매한 충절에는 누구나 탄복했으니, 지금에 이르러서도 대의 앞에 숙연할 따름이다. 의병 중에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생명을 나라 앞에 흠모와 함께 바쳤다.

 

 

 

  일화가운데 선생이 길주로 귀양 떠날 때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례에 따라 호송하는 나졸에게 친지들이 금품을 나누어주려 하던 중, “너희가 만약 이 돈을 받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사양케 하였다. 조헌 선생의 청빈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선생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부모의 말씀을 들을 때는 반듯이 무릎을 꿇고 들었으며, 부모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반드시 손을 씻고 의관을 바로 하였다. 그의 부친이 임종 전 병석에 누웠을 때 쇠고기를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그는 일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한 조헌 선생의 아들 조완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니, 그는 한 몸으로 충과 효를 겸하였으며, 옛 어른과 부모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대단한 효심이다.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정신적 지표로 삼아 인격도야와 자아성취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종두, 월간 충효 199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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